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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대] 초기 증권거래소 국채거래가 대부분...“운영미숙으로 혼란 가중”
  • 박문 기자
  • 승인 2020.03.17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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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56년 증권거래소 설립은 한국 자본시장의 발달의 기초가 됐지만 운영미숙으로 혼란도 가져오게 된다. 

증권거래소의 설립당시 자본금은 3천만 원으로 증권단을 비롯, 금융단, 보험단이 공동으로 출자한 영단제(營團制)로 출범했다.

증권거래소 (사진= 한국투자금융20년사)
증권거래소 (사진= 한국투자금융20년사)

증권거래소 개소 당시의 상장 주식은 12개사 13종목이었고, 채권은 국채 3종목이었다. 상장종목은 거래소 서립이전 증권업협회에서 매매되고 있던 주식 11종목에 증권거래소 출자증권과 연증주(聯證株·후 증금주)가 추가 13종목이다.

13개 종목을 보면, 조흥은행, 저축은행(제일은행), 상업은행, 흥업은행(현 우리은행), 경성방직, 남선전기구주, 동신주, 조선운수, 해운공사, 조선공사외 추가된 2종목이다.

상장국채는 건국국채 제5회(마號), 제6회(바號), 제7회(사號)의 3종목이다.

거래소 개소 당시 거래원수는 47개사로 거래종목은 실물거래와 청산거래의 2종목이었다.

1978년 재무부가 발간된 재정금융30년사에 따르면, 증권거래소가 개장된 이후 수년간 증권거래는 국채거래가 주류를 이루었다. 

가격변동이 큰 주식이 확정이자부증권인 채권에 비해 거래실적이 부진하였던 데에는 동란후 긴박한 적자재정의 보전을 위해 건국국채의 발행이 계속됐다.

반면, 당시 주식회사는 그 체제가 미숙했고 수익성에 대한 보장도 불확실했다. 종목과 수량 공히 증가를 못 볼 뿐만 아니라 상장주식의 대부분은 정부가 소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증권거래소 개장 후 6년 간 실적을 보면, 총 거래대금 1,060억 환의 77%를 국채가 차지함으로써 국채거래가 증권시장에서 점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특히 건국국채는 상장된 후 시중의 고율 사금리를 반영하여 시장수익률이 년 100%에 달하기도 했다.

증권시장은 고도로 발달한 조직과 기술이 필요하며 국민경제의 수준과 금융 및 자본시장이 일정한 궤도에서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만 발전을 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증권시장은 6.25동란직후의 극히 취약한 기반위에서 형성되었다. 우리가 직접 증권시장을 운영한 경험도 없어 조직이나 기술상의 허다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더구나 증권회사의 미약한 자본력이나 공신력은 당시의 청산거래제도를 악용, 증권시장을 투기장화해 크고 작은 파동을 일으켜 사회물의를 불러일으킨 사례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간이 1958년의 1.16국채파동과 1959년의 대증권소동(大證券騷動)이다.

1.16국채파동은 1957년 9월 재무부가 신년도 예산위의 국회 제출과 함께 18억 환에 달하는 제11회 국채발행동의안을 제출하면서 비롯된 국채의 발행여부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대립이  책동전의 양상을 띠며 표면화된 사건이다.

국채발행동의안에 대해 국회재경위의 치열한 논쟁으로 발행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반반으로 갈리게 되자 발행가능성을 예측한 매도측과 발행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한 매수측이 정면대립, 매수측이 국채매점을 강행하고 매도측이 이에 매방(賣方)으로 응하면서 청산거래를 이용하여 쌍방의 무절제한 주장으로 수도불능(受渡不能)의 상태에 까지 몰고 갔다.

국회심의가 지연됨에 따라 점점 가열된 양측의 책동전은 1957년 말 국회본회의에서 정부, 여당의 합의에 따라 11회 국채발행안을 무수정 통과시키게 되자 1958년 1월4일 발회일부터 10회 국채가격이 폭락했고 시세만회를 위한 매수측의 완력매작전(腕力賣作戰)으로 매매쌍방의 금액차이로 또 한 차례 가열돼 매수측이나 매도측 모두 정상적인 수도를 할 자금력이 없이 증시를 파국으로 몰고 갈 위험성이 농후해졌다.

이에 재무부는 금액차가 극에 달했던 1958년 1월16일의 제10회 국채거래를 전면 중지했다.

이에 따라 증권거래소는 15일 현재의 건옥(建玉. 거래소에서 아직 결제되지 않은 상품)에 대해서만 1월25일까지 정리매매를 허용하는 한편 잔여국채는 28일까지 매매를 실시하도록 대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당시 매수측 5개사의 10회 국채 건옥 설정액은 이미 174,100천환에 달해 수도불가능의 사태는 결정적이었다. 이에 따라 증권거래소는 재무부에 청산거래 결제자금으로 특별융자를 요청하여 1월27일 정부로부터 47백만 환의 긴급융자를 받고 건옥 설정된 10회 국채를 공매하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이 국채파동에 있어 매수를 주도한 업자는 미화, 제일증권주식회였고 매도에 앞장선 업자는 대양, 수도, 유양증권주식회사이었다.

국채파동으로 업계의 자금난은  한층 가중됐고 투자자의 이탈로 증시는 장기침체를 맞게 된다.

또 하나 사건인 1959년 3월부터 7월까지 사이에 일어났던 대증권소동으로 대한증권거래소 출자증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업자들의 책동전을 말한다.

대증권소동은 그 배경으로서 증권거래법의 국회통과가 낙관 시되면서 동 법안의 통과에 따라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제나 회원제로 성격이 바뀔 것을 기대한 대증권 매점작전이 일부업자들에 의해 전개되었던 상황을 들 수 있다.

결국 대증권소동은 매점을 추진하는 매수측의 자금여력과 이에 대적하는 매도측의 현물보유고의 대결로 요약될 수 있다. 약 4개월을 끌어온 이 대결에서도 대증권의 7할 가까이를 보유하고 있던 금융단 및 보험단에게 물량지원을 받은 매도측이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한 매수측에게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증권시장은 매우 취약해졌고 시장기반도 흔들리게 됐다. 이는 당시 증권시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능력의 부족이 표면적으로 부각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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