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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대] 산업은행 등 특수금융기관 설립
  • 박문 기자
  • 승인 2020.02.25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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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은행 귀속주 처분으로 민영화 추진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53년 7월 휴전 후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초점은 전쟁복구와 악성 인플레 수습이라는 2대 과제로 모아졌다.

정부는 그해 말 국제연합군사령부와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협약’을 맺는다. 

협약에서 경제재건과 물가안정의 결의를 밝히고 재정의 균형, 금융의 안정화, 단일환율의 설정, 자유기업원칙, 대충자금운용원칙 등 경제재건의 기본방향을 설정했다.

이에 따라 500대 1의 단일환율 유지와 이를 위한 재정금융의 긴축정책이 실시됐다.

금융면에서도 경제재건 뒷받침을 위해 한국산업은행 설립, 일반은행의 민영화, 시중은행의 통합, 농업금융제도 등의 정비가 이뤄졌다. 

(사진= 산업은행 당시 본점)
산업은행 당시 본점 

정부는 산업재건에 중추적인 역할 담당과 금융제도 정비의 일환으로서 식산은행을 토대로 한 한국산업은행을 설립하고자 1951년 7월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한국산업은행법을 만들었다.  

법안에 따르면, 한국산업은행은 ‘국책에 부응하여 재정자금을 중요산업에 융자 관리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안정과 산업부흥의 촉진’을 목적으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1년 이상을 기한으로 하는 중요산업자금의 대출 및 관리와 중요산업의 회사채의 응모와 채무의 인수, 보증, 정부자금의 차입, 예금의 수입, 산업금융채권의 발행 등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한국은행법과 은행법 기초자인 미국의 블룸필드 박사는 ‘한국금융에 관한 보고와 건의’라는 보고서에서 “악성 인플레를 고려할 때 아직 본격적인 산업부흥계획을 수행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산업은행을 정부의 직접 감독 아래 둔 것은 금융통제권한의 일원화를 추구하는 한국산업법과 은행법의 입법정신에 위배된다.

동 법안은 한국산업은행이 장기금융과 단기금융을 겸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장기금융업무와 단기 상업 금융 업무를 혼합운영하는 것은 건전한 은행경영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은 당시 금융통화위원회 자문답신서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휴전 후 산업재건이 필요로 함에 따라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53년 12월 ‘한국산업은행법’이 제정 공포되고 다음해인 1954년 4월1일 한국산업은행이 설립하게 된다.

이와 함께 일반은행의 민영화와 통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1950년 5월5일에 공포된 은행법은 귀속주의 처분에 따른 애로와 증자, 자산재평가 문제 등으로 그 시행이 유보됐다가 54년 8월15일에 되서야 시행하게 된다.

은행법의 실시로 금융기관은 금통위가 결정하는 방향에 따라 예금지급준비금을 보유하게 된다. 그 전에는 정부의 직접감독을 받았으나 은행법의 실시로 금통위의 통제와 지시 하에 한국은행과 은행감독원장의 감독과 검사를 받게 된다.

당시 은행법이 예금자보호와 경영의 자율화, 건전화를 기본정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금융기관 민영화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은행법 실시 후 제1단시책으로 취해진 조치는 정부관리아래 있는 1954년 은행귀속주의 불하요강(拂下要綱)을 발표한다.

이 안에 따라 54년부터 6차에 걸쳐 불하공매가 이루어 졌으나 주식의 소수인에 의한 지배를 배제한다는 견지에서 1인당 입찰주수와 양도를 제한하는 등 공매조건이 까다로워 모두 유찰됐다.

주식의 대중화를 시도하는 사례였으나 부의 편중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1957년 제7회 공매 때에는 소수지배가 되더라도 조속한 금융의 민영화를 위해서는 입찰주수의 제한을 철폐해야 한다는 정부의 방침변경으로 총 공모주 전액이 낙찰됨으로써 일반은행의 민영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1956년 3월에는 대한증권거래소의 개장과 함께 각 은행주식을 증권시장에 상장하여 민간자본의 은행주식투자 참여의 길을 띄워주었다.

아울러 자본금의 부족을 일반공모에 의한 증자로 충당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한국자본시장의 서막이 시작된다.

한편, 한국은행은 은행법 시행과 동시에 금융기관점포행정을 재무부로부터 이양받게 됐다. 

그러나 금융기관점포가 주요도시에 밀집되어 은행 간 과당경쟁이 야기된 반면, 지방 소도시점포는 경영수지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에 한국은행은 1954년 10월에 한국신탁은행과 한국상공은행을 통합하여 한국흥업은행( 한일은행 전신 지금은 우리은행)으로 출범시켰고 이어 1955년 12월에는 각 금융기관의 적자점포를 대폭 정리하게 된다.

한편, 한국산업은행과 시중은행들이 자금 부족과 토지개혁 등으로 농가의 대분은 신용수요를 고리사채에 의존하게 된다. 

이에 정부에서는 고리사채로부터 농민을 구제하고 농업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농업금융의 제도적인 기관이 필요했다.
 
이 요청에 부응하여 1955년 미국의 농업금융가를 초빙하여 건의안을 작성하게 했고 이를 토대로 특별법에 의한 농업은행 설립이 구체화된다.

그러나 국회와 정부부처간의 이견으로 입법이 어렵게 됨에 따라 우선 과도조치로서 금융조합과 동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1956년 5월 은행법에 의한 주식회사 농업은행이 탄생했다.

농업은행은 농민, 농업협동조합, 농업단체의 출자로 발족됐는데, 최고의결기관으로 농업은행 총재, 농협중앙회장 등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두고 농업은행 운영상의 기본방침을 결정하도록 했다. 

농업은행은 조합금융기관의 성격과 정책금융기관의 성격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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