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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대] 조선식산은행, 조선총독부 산하 산업정책금융기관으로 출범
  • 박문 기자
  • 승인 2020.01.29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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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조선은행 설립과 더불어 일본의 금융자본침투가 본격화됐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나라의 금융제도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새로운 정비확장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진설명: 조선식산은행은 한국식산은행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이후 1954년 ‘한국산업은행법’에 따라 한국산업은행으로 재출범해 지금에 이르렀다. (사진= 한국금융30년사)
조선식산은행은 한국식산은행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이후 1954년 ‘한국산업은행법’에 따라 한국산업은행으로 재출범해 지금에 이르렀다. (사진= 한국금융30년사)

1978년 재무부가 발행한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먼저 1911년에는 한일 간 금리차에 따른 일본 자금의 과도한 한국유입을 막기 위하여 ‘조선이식제한령(朝鮮利息制限令)’이 제정됐다.

1912년에는 1906년에 발포된 ‘은행조례’를 폐지하고 ‘은행령’을 공포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동경영에 의한 일반은행설립의 근거를 마련했다.

은행령에 따라 새로운 은행들이 잇따라 신설됐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동출자로 설립된 은행은 1912년에 대구 선남상업은행(후에 선남은행으로 명칭변경)과 구포의 구포은행(후에 경남은행의 개칭), 1913년에 부산 상업은행과 대구은행, 1820년에 전주의 3남은행이 설립됐다.

우리나라 독자경영은행으로는 충남의 호서은행(1913년), 동래은행(1918년), 대구의 경일은행(1920년), 고성의 해동은행(1920년), 광주의 호남은행(1920년) 등이다.

일본인의 독자경영은행으로 원산의 칠성은행(1912년), 경성은행(1913년), 진남포의 삼화은행(1916년), 원산상업은행(1919년), 대구의 경상공립은행(1920년) 등이다.

특히 1914년에는 그동안 급격한 산업경제의 발전에 따라 이미 현실에 맞지 않은 ‘농공은행조례’를 개정하고 농공은행의 영업범위를 확대했다. 기존 영업종목에다 비영리법인에 대한 무담보대출, 토산물을 담보로 하는 어음대출, 유가증권에 대한 대부, 환업무 등을 추가하여 그 영업범위를 확대했다.

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업무를 대리하여 동 회사의 풍부한 자금을 지방농공업자에게 침투시키는 길을 열어주었다.

같은 해 ‘지방금융조합규칙’을 개정하고 지방금융조합이 농공은행업무를 대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농공은행은 정부의 특별한 육성방침아래 제도적인 기반을 개선 강화했지만 각행이 특정영업구역만을 대상으로 운영됨으로써 자금의 조달면에서 기본적인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다.

농공은행만으로는 제1차세계대전을 전후한 산업의 급격한 성장에 따른 자금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여건 속에 분산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하여 자본금을 증액하고 기채능력을 확대함으로써 산업자금을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특수정책금융기관의 설립이 논의되어 1918년 6월에 ‘조선식산은행령’이 공포되고 같은 해 10월에 조선식산은행이 발족된다.

즉 조선식산은행은 일제강점기의 특수은행으로 설립된 은행이다.

공칭자본금 1000만원 납입자본금 419만원으로 출발한 조선식산은행은 장기저리자금 공급기관으로서의 특수성에 따라 정부로부터 다양한 특전이 부여됐다.

특히 식산은행은 장기저리의 산업자금공급기관이기 때문에 일정한 한도 내에서 채권을 발행하는 특전이 부여됐다.
 
식산은행 주식 중 정부소유분에 대하여는 제1회 불입 시 금액불입을 단행하여 자본의 충실화를 도왔고 아울러 동 주식에 대하여는 15년간 이익배당도 면제했다.

또한 주식에 대한 이익배당을 보증하고 자금조달을 지원하기 위하여 식산채권에 대한 일본 대장성 예금부의 인수를 허용하여 주었다.

조선식산은행은 그 업무로서 산업금융과 공공금융 이외에도 일반금융업무를 겸영하고 있었다. 조선은행과 대리점계약을 체결하여 국고금을 취급하는 한편 도금고와 시금고로서 각 도 시비의 출납을 담당했다. 일본권업은행의 대리점으로서 동 은행이 발행한 채권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산은행 본래의 업무는 어디까지나 산업금융과 공공금융으로써 중요산업 또는 공공단체에 대한 상환기간을 5년에서 50년까지의 장기대출과 사채의 응모 또는 인수에 의한 장기자금공급이 업무의 핵심을 이루었다.

조선식산은행은 한국식산은행으로 이름이 변경된 후 1954년 ‘한국산업은행법’에 따라 한국산업은행으로 재출범해 지금에 이르렀다. 

한편, 1918년 6월 ‘조선식산은행령’의 공시와 때를 같이하여 ‘지방금융조합령’이 폐지되고 ‘금융조합령’이 공포됐다.

새로운 금융조합령에 의해 금융조합연합회가 창설됐다. 동 연합회는 소속 조합에 필요한 자금 공급, 소속조합으로부터의 예금의 수입과 소속조합 상호간의 연락업무를 담당함으로써 개별조합의 지도기관 또는 자금조절기관으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 ‘금융조합령’에서는 이러한 도연합회를 통활하여 중앙회의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자금사정 등을 이유로 설립을 뒤로 미루고 우선 업무상의 지도감독은 총독부가, 자금공급은 식산은행이 담당하도록 했다.

1922년에는 ‘무진업령’에 의해 특수금융기관으로서의 6개의 무진회사가 설립됐다. 

무진제도는 그 이전에도 일본인의 집단거류지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1921년 7월말 현재 영업소소가 77개에 달했지만 이를 규제할 수 있는 법규가 마련되지 않아 가입자가 피해를 입게 되는 사례가 많았다. 

‘무진령’이 제정되면서 기존의 무진업계는 회사형태로 정비되어 무진업이 새로운 재도금융으로서의 기틀을 갖추게 됐다. 무진은 상호신용계라고도 하는데 도시노동자와 영세상인들이 주로 자금을 융통하는 서민금융기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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