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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대] 아관파천과 로한은행(露韓銀行) 설립
  • 박문 기자
  • 승인 2020.01.07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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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895년 4월15일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이에 따라 청일간에는 청나라 봉천성(奉天省) 남부의 요동반도를 일본에 넘긴다는 조항을 넣은 마관조약(馬關條約)이 체결됐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러나 내용이 공표되자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은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는 결의를 표명했고 해군함대를 동원 간섭하자 일본은 요동반도의 영구점령을 포기했다.

이 와중에 러시아는 신흥세력으로 새롭게 대두됐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조선왕조는 민씨일파를 중심으로 배일친로(排日親露) 정책이 표면화됐다. 

청일전 개전 이래 일본은 조선내정에 단독간섭, 침략자로서 갖은 행패를 자행함으로써 안으로는 우리국민들, 밖으로는 구미열강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간섭을 자초하게 된다.

일시에 만회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황후민씨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이다. 

극심한 혼란속에서 기회를 활용한 친러시아파들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을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는 궁녀용 교자를 타고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부른다. 이를 계기로 친일정권이 몰락하고 러시아가 득세하게 된다.

우리 국민들의 자각이 싹트며 독립협회가 탄생했다. 독립협회는 먼저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국왕이 환궁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1897년 2월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게 된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다시 대신과 일반 선비들과 함께 황제칭하기를 국왕에게 요청한다.

1897년 8월 건원부터 실시하기로 칙령을 내리고 당월 17일부터 광무(光武)를 사용하고 10월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 국호를 ‘대한’이라 일컬어 독립제국임을 만방에 선포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형식과 명칭에 그칠 뿐이었다. 구미열강은 물론 러시아 간섭은 계속된다.

한국은행 한규훈 당시 차장이 편수한 ‘조선은행 40년사’에 따르면 즉위식이 끝난 10월 하순 러시아대리공사 스페에르의 책동으로 정부는 영국인 재정고문의 브라운을 해임하고 후임에 러시아 알렉세프를 부임시켰다.

이런 문제로 영국제국과 국제문제가 시작됐다. 

알렉세프를 재정고문으로 앉힌 러시아황제는 1898년 3월 자본금 50만 루블을 투자하여 러시아공사관내에 로한은행(露韓銀行)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은행권과 주화발행을 획책하여 화폐의 권종, 도안, 구격을 정하고 배면에 러시아식 독수리 무늬가 새겨진 반환은화(半圜銀貨)를 만들게 된다. 이런 사실을 탐지한 일본은 마침 브라운의 해고로 러시아와 감정이 좋지 않던 당시의 동맹국 영국 황제와 합세하여 제정러시아 세력과 대항하게 된다.

영국황제는 즉각 극동함대를 출동시켜 군사적 시위를 벌이며 우리정부로 하여금 브라운을 복귀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견디지 못한 제정러시아는 알렉세프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1898년 5월 개설 3개월 만에 로한은행을 폐쇄했다.

그해 9월 우리정부는 일본인 增田信三과 용산전환국(龍山典圜局)의 건설계약을 체결했다.

다음백과에 따르면 전환국은 개항 이후 고종은 종래에 통용되어오던 상평통보로 대표되는 동전 외에 금전·은전과 지폐를 동시에 유통시켜 근대적 본위화폐제도를 마련하고자 했다.

1900년 원효로에 용산전환국이 설립됐고 화폐주조시설 외에 우표인쇄를 위해 설치된 농상공부 인쇄소를 흡수함으로써 지폐 제조에 필요한 제지고와 인쇄소가 설치됐다. 

전환국이 실제의 유통화폐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백동화를 대량으로 주조·발행한 시기였다. 

그러나 1904년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는 전환국에서 백동화를 남발한 것이 화폐제도 문란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는 구실 아래 고종의 재가를 얻어 백동화의 주조를 정지하고 전환국을 폐지했다. 전환국 소유의 기계·물품 등은 탁지부에서 조검·보관하도록 해 조선 자체의 조폐시설은 사라지게 됐다.

용산전환국(龍山典圜局)의 건설은 지지부진했다. 화재 그리고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간 충돌, 재정권에 일본 측의 기술자 소환 등 우여곡절 끝에 1900년 5월에야 공사가 마무리돼 시운전을 하게 된다. 그해 8월, 인천전환국의 시설을 이주 건설하고 9월10일부터 백동화(白銅貨)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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