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마침내 올해 소비자금융이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대부분 금융지주나 은행들의 경영전략에는 반드시 손님중심, 고객중심이라는 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고객중심이라는 말은 수사에 불과했으며 개발시대의 고객은 단지 허울뿐이었다.

2019년 1월1일 우리은행 손태승 은행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의 기틀을 마련한 고종황제의 묘소(홍유릉)를 참배하여 우리은행의 힘찬 도약을 다짐하고 창립 120주년의 새 아침을 맞이했다. (사진= 우리은행 제공)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 이후 은행이란 기관이 조선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시절 재무부가 만든 ‘한국금융30년’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적 의미의 금융은 1878년 6월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 설치가 그 효시이다.

이를 기점으로 보면, 한국의 금융 역사는 140년이 넘었다. 

반면, 민족금융기관 최초로 설립된 지금의 우리은행 전신인 1899년 1월 대한천일은행 설립을 기점으로 보면 올해가 한국금융 12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와 관련 올 1월 우리은행은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여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이라는 우리은행의 창립 이념을 되새겨보고 이를 계승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사회, 은행, 직원 모두가 건강해지는 2019년을 만들어 가겠다는 신년 의지를 전한 바 있다. 

당시 손태승 우리금융그룹 회장 겸 우리은행장은 1월4일 창립기념사를 통해 “우리은행 120년 역사는 고객님과 함께 만들어 온 역사다”라며, “국가 경제를 지키는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으로서 금융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해 나아가는 은행을 만들겠다”고 민족 정통은행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강조했다.

아울러 “올해는 고종황제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다”며, “우리은행의 모태이자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고종황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바라보며 창립기념식을 진행하게 되어 그 의미가 더해지는 것 같다”고 손태승 은행장은 창립행사의 소회를 전했다.

대한천일은행은 민관 합작은행으로 고종이 3만원 정도의 황실자금을 출연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이다. ‘대한’은 광무 황제의 대한제국 이름에서 따왔으며 천일은 하늘아래 첫 번째은행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1901년에는 영친왕을 은행장으로 추대하고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팔 수 없다"고 명시하는 등 민족은행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일제의 금융 침탈에 맞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대한천일은행이 앞장서 벌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금융발전사를 보면 금융제도면에서 8·15해방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8.15해방이전에는 일제하의 금융시대를 말한다.

강제로 이식된 근대적 금융제도는 외관상으로는 체계적으로 정비되어갔으나 이는 단지 일본의 산업정책과 대륙침략정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우리나라에서 조달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제치하의 우리나라 금융제도는 식민지금융기관에 불과했으며 일본의 수탈로 인해 우리나라 정부와 민초들의 삶은 피폐했다.

본격적인 근대금융의 시작은 8.15해방이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해방이 됐지만 6.25사변, 4.19혁명, 5.16 혁명 등 엄청난 대변혁의 사건들로 인해 인플레이션, 화폐개혁 등 금융산업은 혼란과 수습이라는 과제를 통해 조금씩 기틀을 마련했다.

더구나 해방이후 미 군정의 지원 등으로 재정금융을 지탱했으나 1960년대이후 미국원조가 대폭 감소하는 등 험난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의욕적인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해 정부 주도의 성장금융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내자동원의 극대화와 지역경제의 균형발전을 촉진하고자 지방은행 설립도 본격화 했다.

1970년대에는 경제규모가 팽창하면서 은행의 역할이 강화되었고 자본시장, 보험시장, 사금융영역까지 체제정비가 강화됐다.

1980년~90년대 중반까지는 성장금융시대로 개방화, 세계화, 국제화로 발돋음하는 시기로 볼수 있다.

특히 1996년 10월19일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이 됐는데. 이는 세계화와 개방화, 자본자유화의 첫걸음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준비안된 국제조약 가입은 후에 IMF 외환위기 원인이라는 분석이 제기될 정도였다.

특히 1997년 우리나라의 IMF외환위기는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라는 믿음이 한 순간에 깨지게 된다. 수십년동안 은행감독권을 가지고 한국은행과 재무부의 힘겨루기가 한 순간에 IMF가 정리해버렸다.

결국 은행, 증권, 보험 그리고 2금융권을 총괄하는 오늘의 금융감독원이 출범을 하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금융산업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금융시장이 팽창하게 되고 금융의 국제화, 금융자율화가 빠르게 진전됐다. 1997년 IMF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우리경제는 물론 금융산업도 빠르게 세계화에 편입하게 된다.

지금은 세계경제, 특히 미국과 중국경제와의 동조화로 인해 가치사슬로 엮이게 되어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금융시대를 연재하면서 시대별로 굵직한 사건 그리고 정책, 금융변화를 중심으로 엮어나가고자 한다.

시대를 구분함에 있어 재무부가 발간한 ‘한국금융 30년사’ 등을 참고하면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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