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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대] 민족은행 대한천일은행 설립...121년 이어온 우리은행
  • 박문 기자
  • 승인 2020.01.14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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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에 합병된 조흥은행은 과거 우리나라 최초민족은행 출범에 관한 시작과 관련해서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 우리은행으로 한국 금융역사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2020년 한국금융 역사는 121년을 맞이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3일 서울 회현동 본점에서 창립 121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오랜 기간 우리은행과 희로애락을 같이한 고객, 역대 은행장 12명, 손태승 우리금융그룹회장 겸 우리은행장을 비롯한 임직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손태승 회장은 창립기념사에서 “우리은행은 121년 역사의 민족 정통은행으로서 고객의 한결같은 지지와 성원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며 “고객신뢰 뿐만 아니라 은행 선배들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금융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은행이 되어야 한다”며 우리은행을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초일류 금융기관으로 도약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19세기 초로 돌아가보면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항구가 개방되면서 외세자본과 함께 외국계 근대은행이 우리나라에 진출했다. 

일본은행들의 조선 경제 침략이 점차 본격화 되자, 외세자본에 대응하기 위해 상인들은 민족은행의 설립을 도모했다.

1896년 조선은행, 1897년 한성은행, 1898년 대한은행 등이 설립됐지만 역할에 한계를 보였다. 

이때, 지금의 우리은행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이 1899년 1월 30일 설립하게 된다. 대한천일은행은 민족자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상인층이 중심이 되어 만든 은행이다.

상인들은 고종황제의 윤허를 받아 자본금을 지원받았고 정부관료를 은행경영진으로 영입했다.

은행명은 일본제일은행을 의식해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으로 대한천일은행이라 명명했다.

고종황제는 내탕금 3만원(元)을 지급하여 대한천일은행 창립을 지원했다. 1902년에는 황실이 직접자본을 출자하여 주주가 되면서 영친왕이 2대은행장에 취임하게 된다. 민관 합작은행이 설립하게 된 것이다.

창립자본금의 지원과 영친왕의 은행장 취임은 대한제국 황실이 대한천일은행을 관리하고 운영한다는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천일은행은 예금과 대출업무를 담당하는 일반은행의 역할과 백동화의 통화량 조절, 황실과 주요기관의 재정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했다.

거래고객 또한 조선상인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본상인, 청나라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899년 5월에는 금융기관 최초지점인 인천지점을 개설하는 등 건실하게 성장했다.

특히 대한천일은행은 조선 상인들에게 낮은 이자로 자금을 지원하는 등 우리상인 보호에도 앞장섰다.

또한 민족자부심이 대단한 대한천일은행은 “조선사람 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팔 수 없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대한천일은행 관련 기록인 창립청원서 정관에는 중앙은행권 발행, 조세금 취급 등이 기록이 남아 있어 중앙은행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립청원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貨幣融通(화폐융통)은 商務興旺(상무흥왕)에 本(본)이기로 본인이 은행을 창립코저 하여 자본금을 鳩聚(구취)하고 銀行號(은행호)는 대한천일은행이라 칭하고 본점은 황성에 設(설)하옵기에 玆(자)에 청원하오니 趙亮(조량) 認許(인허)하심을 望(망)하나이다.

광무3년 1월22일 이근호 송문섭 정영두 김기영 김두승 박경환

대신은 인허사 탁지부 대신 각하 광무3년 1월30일”
설립 후 대한천일은행은 영업실적이 좋았으나 1902년에 이르러 일본의 경제공황의 여파로 말미암아 우리나라경제도 불황국면에 놓이게 되어 영업을 정지하는 최악에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 놓이자 대한천일은행은 당시 탁지부로부터 긴급구제금융자금 20만원(元)을 무이자로 받는 대신 한성공동창고회사의 지배인이었던 일본인이 은행 지배인으로 임명하여 다시 영업을 재개하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이후 자본금 50만원(元)으로 증액했다.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꾸고 1925년에 대동은행(大同銀行)을, 1928년에 삼남은행(三南銀行)을 흡수합병하면서 발전했으나 경영권은 일본인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어 광복한 뒤 한국상업은행으로 개칭했다. 1999년 1월 한일은행과 합병, 한빛은행이 됐다가 2002년 이름을 우리은행으로 바꿨다.

청원서 (사진=박문)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서 및 인가서
가장 오래된 기업창립문서인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서 및 인가서’는 대한천일은행 창립 당시 정부 관료와 상인 등 6명이 연서한 설립청원서 및 탁지부(현재 금융위원회) 인가서다. 우리은행의 창립 역사를 증명해주는 1급 유물이다.

설립초기 경영진들 (사진= 박문)

청원서를 비롯해 황태자인 영친왕이 1대 주주로 기록돼 황실은행으로서의 성격을 입증하는 주주명부인 좌목, 공첩문안(공문서 중 보존해야 할 문안)과 은행의 주요 업무내용을 알 수 있는 정관, 탁지부가 인가한 개성·인천지점의 창립청원서 등 대한천일은행 창립 관련 문서 일괄 12건 18점은 한국 근대은행 및 주식회사 발달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다.

고려시대 개성상인들이 창안한 우리나라 고유의 장부정리한 방법이 ‘송도사개치부법’이다. 송도사개치부법으로 작성한 각종 은행 장부인 회계책, 장책, 정일기 등 대한천일은행 회계문서 일괄 7건57점이 남아 있다.

광통관 (사진= 박문)
광통관 (사진= 박문)

◇광통관
광통관은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1가 19번지에 있는 우리나라 은행 최초의 근대식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909년 탁지부에서 금융 관련 기관의 집회소로  쓰기 위해 지은 건물로 벽돌조 건물이다. 같은 시기에 창립했던 천일은행의 어음조합에서도 사옥으로 필요하게 되어 이 건물을 대여했다. 1층에는 천일은행의 영업장과 사무실 2층으로 오르기 위한 출입구가 있고, 2층에는 집회실, 흡연실, 예비실을 두어 집회시설인 광통관의 기능을 하도록 했다. 

절충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전면에 화강석으로 이오니아식 주두(柱頭)의 붙임기둥을 설치하여 건물의 중심을 강조했다. 그 윗부분에는 삼각형 페디먼트를 두고 바로크 풍의 돔을 얹었다. 1914년 화재 후 지붕과 각 부위를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하면서 각 부의 장식, 창문 주위, 지붕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현재 우리은행에서 영업장으로 사용하고 있어 내부에는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고 외관만 화재이후 수리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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