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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대] 6·25 동란으로 전시금융체제에 돌입한 한국은행
  • 박문 기자
  • 승인 2020.02.18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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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50년 3월 ‘경제안정15원칙’에 따라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6월12일 한국은행이 설립된 지 나흘 후 6.25 동란으로 우리나라는 큰 시련을 맞았다.

한국은행은 전시금융체제로 전환하고 1950년 6월28일 정부의 남하와 함께 본점을 대전으로 이동했다. 또 한국은행이 보유한 금과 지금은(地金銀), 현찰 등을 긴급히 소개했다. 그 뒤 전선의 남하에 따라 한국은행도 본점을 대구로 옮겼다가 다시 부산으로 이전했다.

당시 우리정부는 전쟁수행을 위해 ‘사변수급비상경비예산’을 편성하고 1950년 10월까지 월별로 자금을 집행했다. 그러나 세입원의 상실과 재정지출의 급속한 증대로 대부분의 자금은 한국은행으로부터 차입으로 의존했다.

이후 한미 간 체결된 ‘UN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한국은행이 UN군에 대한 대여금 형식으로 UN군의 전비까지 조달하게 되자 통화팽창에 의한 인플레는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이 건물은 1950년 6월12일 한국은행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으로 창립되면서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되었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내부가 거의 파괴되었는데 1958년 복구됐다. 1987년 이 건물 뒤편에 한국은행 신관(현 본관)이 준공되면서 원형복원 공사를 착수하여 1989년 완공했다. 이후 2001년 한국은행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화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한국은행 누리집) 

전시 중에도 한국은행은 대구에서 천원권과 백원권 두 종류의 화폐를 발행했다. 조선은행 시절에 발행했던 화폐와 같이 유통됐다. 북한군의 점령지역에서는 인민권, 조선은행권 불법발행 등으로 극도의 혼란을 보였다.

1978년에 발행된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적성통화를 배제할 목적으로 1950년 8월28일 대통령긴급명령제10호로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의 관한 건’을 공포했다.

긴급명령에 따라 한국은행은 1950년 9월15일부터 이듬해 4월30일까지 4차례에 거쳐 오염된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전시로 인한 인플레 압력상황에서 1953년 휴전 움직임은 뚜렷해졌고 경제안정을 위해 그해 2월15일 대통령긴급명령제13호로 ‘제1차 긴급통화 및 금융조치’를 단행하여 화폐단위를 100분의 1로 절하했다.

당시 주요 조치 내용을 보면, 1953년 2월17일부터 구원화표시 한국은행권의 유통을 일체 금지하는 대신에 새로 발행되는 원화표시 은행권을 법정화폐로 운용토록 했다.

2월17일부터 9일간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예금 등 인출을 금지하고 구은행권과 지급표시 및 예금에 대해서는 1인당 500환씩의 새은행권을 교부하고 나머지는 동결했다.

1950년대 한국경제 주요지표 (사진= 한국은행 50년사)

한편, 전시에는 불안감으로 예금인출현상이 급격히 나타났다. 이에 정부는 전시금융정책을 통해 안정화 정책을 펼치게 된다.

정부는 1950년 6월28일 ‘금융기관 예금지불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하여 예금지급을 세대당 주1만원, 월3만원으로 제한했다. 금융기관 자금경색을 완화하기 위하여 한국은행에 ‘비상지출자금구좌’를 설치하고 비상시 예금지급자금을 금융기관에 공급했다.

비상시지출은 1951년 전세가 호전됨에 따라 2월부터 강력한 저축추진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미 지출됐던 자금 상환을 촉진하기 위해 수차례의 한국은행 여신이율 인상에 힘입어 1952년 3월에는 모두 상환되는 실적을 보였다.   

금융기관 대출한도제는 전시로 인해 흐지부지 하다가 1951년 1월부터 자금별대출한도제 및 대출증가한도제의 방식으로 전환하여 실시했다.

금융통화위원회는 1951년 2월 ‘금융기관 자금운용에 관한 임시조치요강’을 제정하여 예금흡수에 주력하고 특수자금을 우선적으로 융자 취급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경제상황이 계속 악화됨에 따라 한국은행은 51년 6월 ‘금융기관 자금운용에 관한 준칙’을 제정하여 강력한 금융통제를 실시했다.

한국은행은 금융기관의 방만한 자금운용을 억제하고 방출된 자금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1951년 1월부터 금융기관 대출에 관하여 융자사전승인제를 실시했다. 이후 상황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그해 7월부터는 민간대출의 경우 사후보고제로 바꾸고 52년 1월부터는 사후보고제도 폐지했다.

1952년에는 기업체의 생산증강을 도모하고자 생산책임제융자제도를 도입했으나 취급절차가 복잡하고 업체의 생산책임완수 전망도 불투명하여 그해 하반기부터는 이를 폐지했다.

1953년 초부터는 금융거래의 정상적 발전과 융자의 효율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우대어음제를 도입했다.

동란 중 금리정책은 금융기관 예금을 증가시키고 금융기관의 과도한 중앙은행 의존도를 지양하는 방향으로 운용됐으나 인플레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효율적인 여신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

예금지급준비율은 한국은행 설립 당시 예금총액의 10%로 정했으나 동란으로 유명무실한 정책이 됐다.

1951년 4월부터는 전시상황이 효율적으로 비교적 안정되고 금융활동도 정상화 움직임을 보여 예금지급준비율을 인상했다.

당시의 수신내여신원칙 하에서 대기성예금을 바탕으로 한 비정상적인 금융기관 대출이 늘자 1952년 10월에는 지급준비율을 더욱 인상하는 한편 한계지급준비율제도를 실시했다.

1953년 2월 제1차 통화개혁의 단행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지급준비율을 대폭 인하하였다가 점차 인상해 원상복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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