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신항식] 14세기 베니스, 제노아부터 앤트워프, 키에프, 베를린, 모스크바 까지 부자만이 아니라 민중이 함께 부를 누렸던 곳에서는 두 가지의 화폐가 발행 되었다. 물론 이중화폐가 필연적이지는 않았다. 부를 일구는데 여러 가지 제약사항이 많아 이를 피하려다 보니 할 수 없어서 그랬을 뿐이다. 하나는 국제결제용, 다른 하나는 지역결제용이었다. 지역결제 화폐에는 이자가 없었고 과잉발행 될 수가 없었으며, 불노소득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사례가 하나 있다. 

미국 발 불황이 밀어 닥쳤던 1932년 오스트리아의 뵈글(Wörgl) 시는 이미 파산상태였다. 노동가능 시민의 50%가 실업자였고 시 금고에는 고작 4만 실링밖에 없었다. 같은 해 7월 30일 시는 3만 2천 실링을 인출했다. 6%의 이자에 은행에 돈을 맡기고 돈표를 찍었다. 시는 도로포장, 상수도, 나무심기 공사를 벌여 1만 2천 실링을 풀었다. 월급으로 나간 돈표를 한 달 안에 쓰지 않으면 매달 액면가 1%가 줄어들도록 했다. 이를테면 -1% 월 고정 금리이다. 돈표를 받은 사람들은 재빨리 소비하고 세금 내는 데에 썼다. 한 달 동안 8천 실링의 돈표가 돌아다녔고, 소비기한이 지난 4천 실링이 다음 달에 풀려 나갔다. 한 달은 공무원 손에 머물다가, 다음 달은 밥을 사먹은 식당주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 다음 달은 아이 학비로 학교선생의 손에 넘어갔다. 선생은 그것으로 세금을 냈다. 돈표로 세금을 받은 시청은 그것을 다시 공무원 월급으로 주었다.

처음에는 이 정책을 싫어했던 기업들도 돈표를 받기 시작했다. 돈표가 도시 전체를 돌고 돌면서 경제가 급격하게 일어났다. 기업은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무역을 넓혔고 개인은 소비를 넓혔다. 국정화폐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2% 할인을 해 주었다. 일자리가 생기니 주변 도시민들이 국정화폐를 들고 와 돈표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다.

뵈글 시는 단 1년 만에 국정화폐로 줄 수 있는 월급의 12-14배의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엄청난 GDP가 발생했지만 실제 사용된 실링은 10만 실링 정도였다. 마이너스 금리를 부담하지 않으려는 시민들이 앞 다투어 돈표로 세금을 내는 바람에 시의 세수도 많이 들어왔다. 유럽의 모든 도시가 불황에 시달릴 때 오로지 뵈글 시만이 풍요로웠다. 도대체 어찌 이런 기적이 가능했는지 프랑스 대통령 에드워드 달라디에가 시찰을 오기도 했다. 마르크시스트들은 입을 닫았다.  노동자 혁명을 통해 생산양식을 바꾸자고 했다가 막상 화폐 하나로 생산양식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존 마이너드 케인즈는 통화정책 하나만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는 것을 보고 놀라 경탄해 마지않았다. 
  
뵈글 시는 공공사업이 실업을 줄이거나, 은행돈이 경제를 돌게 한다고 결코 믿지 않았다. 공공사업은 멈추어 버린 경제라는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시도였고 신용창출은 시가 하는 일이었다. 시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부자들이 돈을 쌓아 놓고 풀지 않으니 사회에 돈이 메마르고, 돈이 메마르니 국가가 돈을 찍어 낸다. 부자들은 그 돈을 또 축적하고 국가는 돈을 또 찍어내고 부자는 또 축적한다. 바보들의 행진이다. 이 바보짓을 막으려면 돈을 축적하는데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 즉 매주, 매달, 매년 창고에 쌓아놓은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면 된다. 화폐는 축적되지 않고 순환된다. 이 정책이 성공하려면 1) 화폐의 가치가 고정되어야 하고 2) 땅은 국가가 소유하든 하느님이 소유하든 무조건 공(公, public)개념을 가져야 하며 3) 생산되는 상품과 서비스가 널리 소비되도록 자유무역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리하면 일단 이론적으로 1) 개인의 소비와 투자가 활성화 되며 2) 소비자는 화폐를 축적하지 않고 사업을 넓힐 수 있으며 3) 실업을 없애며 4) 경제성장률을 나라 스스로 정할 수 있으며 5) 금리는 제로에 가까워지며 6) 부동산 문제들이 안정되며 7) 경제, 사회 불평등이 해소되며 8)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실제적으로 뵈글 시는 이런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1933년 9월 오스트리아 정부가 돈표를 금지시키기 전까지.  

존 마이너드 케인즈도 그랬지만 수없이 많은 경제학자들이 뵈글 시의 화폐정책에 놀라워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무엇보다 중앙은행의 보복이 두려웠다. 수리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이 정책을 루스벨트 대통령후보에게 건의 했다가 거부당했다. 케인즈는 이자율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작은 도시라면 몰라도 큰 나라에서는 어려울 듯?”이라며 뒤로 물러섰고, 미세스 연구소는 “돈표로 걷은 세금을 국정화폐로 할인 하는데 문제가 생길 것”이라면서 훼방을 놓았다. 이랬든 저랬든 비열한 경제학자들이다. 뵈글 시의 화폐정책은 철학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경제학자들처럼 변명만 늘어놓게 되어 있다. 그 철학이란 다름 아니라 민주주의다.

폴 라파르그는 “노동착취를 가속하는 노동권을 쟁취하겠다고 그리 피를 뿌렸단 말인가? 프롤레타리아여, 창피할 줄 알아라!”며 게으름의 권리를 주장했다. 게으름이라기보다 인간의 창의성을 통해 부를 산출하고 나누는 반노동 친인간의 권리를 말한 것이다.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기본소득은 필요한 것이 맞다. 뵈글 시가 대형사업을 통해 자유-민주적 화폐의 시동을 걸었듯이, 노동이 종말 되어가는 이 시대에 기본소득은 새로운 경제적 생산양식이 나타나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 본다. 물론, 뵈글 시처럼 지역화폐 즉 자유화폐로 기본소득을 지불해야 일단, 국제금융과 해외의 압력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개개인이 가진 독자적인 창의성과 재능의 희소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금, 부동산, 화폐 같은 외부의 물적 희소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이다. 그렇게 인간의 가치를 외부의 물질에 기대는 습관은 부정부패를 일상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인간적 희소가치를 추구하려면 인간사회를 피라미드로 만드는 객관적 희소가치를 없애거나 줄이면 된다. 화폐의 허상가치 즉 이자, 축적시간을 없애고 토지공개념을 확대시키고 축적되는 상품의 빠른 회전 즉 자유무역을 지향하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경제이며 민주주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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