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신항식]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투쟁을 한다는 토마스 홉스는 자유마저도 투쟁적으로 생각했다.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무한히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데에 방해가 없을 것이라 믿는 것 자체가 망상이다. 원하는 것을 무한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망상이다.
즉 자유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망상인 것이다.
이 망상을 서로 갈구하다보니 근대국가는 너는 이만큼, 나는 저만큼 하면서 협상, 다수결, 권력분립 같은 욕망의 충돌방지 장치(checks and balances)만 가득 만들어 놓았다. 자유의 비참한 모습 아닌가. 도대체 뭘 그리 가지고 싶었으며, 가졌다 하더라도 도대체 어떤 자유를 얻겠다고 자유를 저 지경으로 규정했을까. 이 자유의 개념은 최소한 동양의 그것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보아, 개인에게 자유라는 것은 삶의 필요조건에 동조하는 순간(난 이 정도만 있으면 돼! 혹은 없어도 돼!) 발생하는 해방의 느낌이다. 개인에게 자유라는 것은 삶의 필요조건에 동조하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아는 순간(난 원래 이런 사람!) 발생하는 정체성의 느낌이다. 그 때 비로소 자유의 정서가 마음으로부터 올라온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회는 사람의 욕망을 끝없이 부추겼다.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필요조건을 끝없이 부풀려 충분조건까지 가게 했다. 인간의 욕망에는 충분조건이 없다. 따라서 자유를 얻어 올 충분조건이란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자유주의 사회에는 자유가 없거나 달성할 수 없는 무엇으로 남는 것이다. 그러하니 공동체가 생산한 필요물품과 서비스에 만족하고 부족하면 달라하고 넘치면 나누어주는 물질적, 정신적 배려의 보이지 않는 손도 없다. 각박한 사회다. 공존의 마음이 만들어 주는 공동체의 자유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못하는 사회다.

게다가 개인의 자유마저 현실화 시킨 적도 없다. 항상 결핍된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무슨 자유가 있을 리 만무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너는 저런 사람이니 서로 마음을 맞추어 보자는 자아와 타자의 삼투압 관계(전체성)가 파괴된 것이 만인의 투쟁 상태인데, 이 황무지 위에서 충족할 자유를 말했으니 말이다. 
 
코비드-19가 생각보다 오래갈 것 같다고들 한다. 경제를 돌리겠다면서 국가가 돈도 풀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국가가 하는 행동은 토마스 홉스 같은 행동이다. 무슨 소비를 얼마나 키워서 무슨 경제가 얼마나 더 돌겠는가. 국가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소비자는 자신만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세계에 자급자족 국가는 많지 않다. 비행기와 배가 뜨지 않으면 무역에 차질이 온다. 무역이 멈추면 국내 생산도 멈춘다. 생산이 멈추면 기업도 사라진다. 기업이 사라지면 소비도 멈추고 자유도 멈춘다. 지금부터 혹시나 모를 디플레이션을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디플레이션은 사람에게 결핍을 증가시켜 자유를 빼앗는다. 필요조건에 마음을 맞추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스스로 절제하는 습관이 몸에 배면 작은 소비에도 충족하는 마음이 들며 그로부터 자유의 정서를 얻는다. 디플레이션이 오면 결국 알게 된다. 자유는 절제에서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꼭 먹어보아야 된장인 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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