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신항식] 사람들은 준거(reference)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강남에서 유행이 불면 서울로 퍼지고 서울에서 유행하면 지방으로 퍼지는 ‘남 따라 하기’ 현상이 있다. 여기서는 강남, 서울 등이 준거지역이다. 미국이 뭘 하면 따라 하는 나라도 많다.

흔히 사대주의라 말하는데 이때 미국은 준거나라가 된다. 즉 한 나라의 정부나 국민의 행동거지를 결정짓는 교과서로서의 나라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폭력사태도 사대하는 나라들에게 준거인가. 그렇지 않다. 폭력사태는 전 세게 어디나 존재하는 보편 현상이다.

사대주의란 사태의 근원과 처리를 준거로 삼는 자세를 말한다. 이 경우 흑인차별에 대한 저항이 준거다. 그러하니 흑인차별금지를 주장하는 국민들이 흑인차별도 따라 하며 그에 대한 반응도 비슷하게 따라 하는 것이다. 좌파 우파도 마찬가지다. 좌파 우파를 만들어 놓은 국가를 따라가는 것이 좌우대립이라는 것이다. 이리 본다면 인종을 차별하든 그것을 반대하든, 좌파이든 우파이든 모두 사대주의의 산물이다.   
  
사대주의란 하나의 현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토대를 모방하는 행위다. 즉 좌-우, 선-악, 진-위, 미-추 어느 한쪽의 현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모방하는 행위다. 사대주의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사대주의자들은 미국 민주당이나 공화당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의 독특한 양당체제를 거리낌 없이 모방한다. 여권주의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여권-부권의 독특한 대립 관계를 모방한다.

민주와 공화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으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아무런 고려가 없다. 도대체 여성의 권리가 가부장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런 대립이 여성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사대주의자들은 무조건 준거집단이 보여준 관계 구도만 달달 외우고 따라 하는 것이다. 기업인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디서 배워 왔길래 생산자-소비자의 대립 관계를 모방하는지, 소비자를 무조건 대상화시켜 본다. 생산자가 소비자이고 소비자가 생산자라는 융합적 현실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 융합의 현실을 가장 적절하게 바라본 사람이 헨리 포드였다. 헨리 포드는 자사의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짜게 주던 당시의 기업인들과 정반대로 월급을 크게 올려 주었다. 포드 자동차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곧 포드 자동차의 소비자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포드는 또한 재단도 세웠다. 포드재단은 생산 기술과 노동시장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대학과 기관에 지원을 함으로써 생산이 곧 소비이고 소비가 곧 생산과 직결된다는 상식을 일반화했다. 이른바 소비자라는 이들에게 돈을 되돌려 줌(사회적 환원)으로써 생산이 부추겨진다는 경제학의 원칙을 스스로 알고 있던 기업인이었다.

“기업이 살아야 소비가 늘고 일자리가 생긴다.”는 일방통행의 주장이 아니라, “소비가 늘고 일자리가 생겨야 기업이 산다.”는 쌍방적인 생각을 했던 것이다. 포드가 죽은 후 이런 상식이 사라져 버렸다. 자선, 소비자 관리, 사회적 공헌의 위선을 경영전략으로만 생각했던 무수한 기업들이 자기들 스스로 양극화의 늪에 빠져 파산해 갔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대기업들과 초국적 기업들이다. 소비가 사라지면 이들도 별 볼일 없이 사라진다. 경제민주화라는 것은 생산과 소비를 균등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보는 것이다. 재난지원금을 기부해서 국가의 품으로 돌려보내라고? 국가가 기업인가? 기부문화도 들이댈 때가 있고 위험한 때가 있다. 이것은 또 어디서 배운 사대주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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