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신항식] 한국정부가 코비드-19의 대처를 잘했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다, 자유국가의 정부는 작은 것이 좋다는 것이 오랜 의견인데, 이번에 한국 정부는 일을 크게 해서 칭찬을 받았으니 작은 정부가 언제나 이상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과연 그럴까? 정부가 크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시민이 크게 행동하여 정부가 따라 온 것이다.
 
실상, 정부의 법령이 전 국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종족 공동체들을 보면 정부란 것이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전쟁 없고 사회적 갈등 없고 자주적이고 질서라면 가부장 하나 밖에 없는 곳이다. 게다가 개인이 절대 버림받는 법이 없고 불평등 당하는 법이 없으며 생산수단을 공유하니 자기 원하는 일 하지 못하는 법이 없다. 중세와 구체제의 서양에서도 그랬다. 세금을 제외하면 정부의 영향력이 전 국민 90%에도 미치지 못했다. 중세의 왕은 귀족에게, 귀족은 농노에게, 농노는 평민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서로 기대며 살았다. 왕은 귀족의 어떤 권리도 침해하지 않았다. 귀족은 농노를 쫒아 내거나 그의 소유물을 절대 건드릴 수 없었다. 농노는 땅의 용익권(usufructuary right)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주인이 땅을 팔아 토지소유권이 바뀐다 해도 농노는 그 땅을 그대로 경작했고 자식에게도 경작권이 세습되었다. 농노가 주인보다 더 부자인 경우도 많았으며 용익 경작지 말고도 자기 땅을 따로 가지고 있던 자영농-농노도 많았다. 공무원 직위를 살 정도의 재산을 가진 자들은 넘쳐 날 정도였다. 농노(serf)라는 번역어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농노란 보통 땅의 이용자(service)를 말할 뿐, 노예(slavery)를 뜻하지 않았다. 평민의 대다수가 농노가 되고자 노력했으며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동업조합의 일원으로서 도시와 농촌에 제조품을 공급했다. 이들이 부르주아였다. 각 계층은 이렇게 서로 협력적 관계로 존재했다. 농노는 귀족과 기사와 함께 영토방어전에 나갔다. 기사와 귀족은 제일 앞장서서 농노들을 보호해 주어야 했다. 그것이 계약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왕정 운영에 있어서도 그리 나무랄 부분이 없었다. 국가고문원과 법원, 총리와 비서실, 장관의 내각이 시대에 맞추어 왕 주변에 있었고 또한 귀족들의 의회가 있었기 때문에 왕이 일을 단독으로 처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소한의 정부라는 것은 바로 중세의 정부를 말한다. 
 
부르주아가 정권을 잡은 근대의 정부는 실은 압제적인 면이 많았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던 영국 해외정보원 벤담(Jeremy Bentham)은 같은 해 7월 4일 다음처럼 말했다.

“무슨 자명한 진리인 듯, 이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면 정부를 세워야 한다며 좋아하고 있다. 뭘 몰라서 그렇다... 무엇이라 불리든 (근대의) 정부라는 것은 한 쪽의 권리를 짓밟으며 짓밟았으며 짓밟을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선언문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전의 모든 미친 짓을 능가해 버렸다.”

마치 아나키스트 같은 그의 언급은 실은 정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전 세계 어떤 정부도 전 국민의 평등한 이상을 꿈꾸면서 만들어 진 적이 없다. 말만 화려했을 뿐이다. 의회는 정부운영의 권력을 거의 통째로 가져 오는 귀족 부르주아 연합도당의 집합소였다. 이것이 현대의 내각제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강건하게 살아 있는 한, 아무리 도당적인 정부라 해도 시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며 정치적 모략을 꾸미지만 않는다면 시민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부를 운영하지는 않는다. 향후에 어떤 실수를 또 할지 모르나 한국정부는 이번에 잘했다고 본다. 결국 이는 시민의 힘을 두려워 한 결과라고 본다. 세계인들이 한국에서 본 받을 무엇이 있다면 조국에 헌신하려는 시민정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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