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박물관 '수원 산루리의 독립운동가' 특별전시

 

[우먼컨슈머= 김아름내 기자] 1919년 3.1운동 이후 수원에서는 해방을 맞는 순간까지 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노동자·농민 투쟁, 항일 격문 배포 등이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산루리의 독립운동가 이선경 자매 등이 있었다. 수원 산루리는 일제강점기 향교로와 수원화성의 4대문 중 하나인 팔달문 사이에 있던 마을로 현재의 수원시 팔달구 중동·영동·교동 지역이 해당한다. 

수원박물관은 독립운동가 이선경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오는 7월 4일까지 특별전시를 진행한다고 17일 전했다. 

수원 산루리의 독립 영웅들 전시 (사진= 인터넷언론인연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이선경(1902~1921)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산루리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등 100여 점을 전시하고 영상으로도 소개한다. 

김경표 학예사에 따르면  산루리에서 태어난  이선경은 수원 보통학교 졸업 후 숙명 여학교, 경기 여자 보통학교를 입학해 서울로 통학을 한다. 여기서 만난 박성태, 최문순 등과 '구국민단'을 결성하고 상해판 독립신문 '애국찬가' 등을 각 마을에 배포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의 가족 구호도 진행했다.

구국민단 단장은 박성태로 그 역시 산루리 출신이다. 이선경은 박성태에게 받은 130엔으로 상해임시정부로 가 적십자 간호부가 되고자 했으나 경성에 머물다 체포됐다.

이선경이 투옥된 곳은 서대문 감옥의 '여감방'으로 유관순도 갇혀있던 곳이다. 

'구국민단 공판' 1921년 4월 1일 자 기사에 의하면 구국민단 단원들은 다 나와 재판을 받고 있는데 이선경만 궐석재판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선경이 법정에 출석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 일제는 이선경의 옥사 가능성이 커지자 급하게 석방시켰다. 이선경은 수원역 앞쪽 민가 그 부근으로 추정되는 오빠 이완성의 집에 머물러 치료를 받다가 9일 만에 순국했다.

김경표 학예사는 "이선경 독립운동가는 19살 어린 나이에 조국을 위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이선경의 언니 이현경과 동생 이용성에 대한 이야기도 전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현경은 일본 유학 시절 1921년 3월에 3.1만세 운동 2주년을 기념한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귀국 후 전국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이용성 역시 수원에서 사회운동을 펼치면서 해방 이후에 수원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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