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올레길’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역사적이고, 교육적인 새로운 ‘길’이 상춘객들을 부른다. 바로 ‘추사 유배길’이다.

제주관광공사가 새롭게 조성한 이 길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제주 유배 시절을 조명한다

추사는 시, 서, 화는 물론 경학, 금석학, 불교학 등의 대가로 박제가(1750~1805), 정약용(1762~1836) 등 국내 실학자를 비롯해 옹방강(1733~1818), 완원(1764~1849) 등 청나라 석학들과 교류하며 19세기 동아시아를 주름잡았다.

1839년 추사는 병조참판에 오르며 당시 조정을 지배하던 안동 김씨에 맞서는 신진 세력의 구심점이 됐다. 그러자 안동 김씨들은 이듬해인 1840년 추사를 공격해 관직에서 끌어내렸다. 그래도 성에 안 찼는지55세인 그에게 6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장 36대를 때린 뒤 만신창이가 된 그를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離安置)해 버렸다. 위리안치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형벌이다.

역모에 연루된 것도 아닌 추사를 최남단인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집권세력이 추사의 영향력을 몹시 두려워했다는 방증이다. 최대한 멀리 외딴 곳으로 보내려 했고, 육로로 먼 길을 걸은 뒤 다시 해로를 이용해야 하는 힘들고 위험한 귀양길을 통해 사고를 당해 죽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꼼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추사는 1849년까지 9년 동안 계속된 척박한 제주도에서의 유배 생활 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예술혼은 더욱 강렬해져 좁은 초가 방구석에서 1844년 역작 ‘세한도’를 그렸으며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 유배길은 크게 제1코스 ‘집념의 길’, 제2코스 ‘인연의 길’, 제3코스 ‘사색의 길’로 나뉜다.

집념의 길은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번지 ‘제주 추사관’에서 시작해 송죽사 터(0.2㎞)→송계순 집터(0.3㎞)→드레물(0.6㎞)→동계정온 유허비(0.7㎞)→한남의숙 터(1㎞)→정약용의 형 정약현의 딸로 1801년 남편 황사영(1775~1801)의 백서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관노로 유배왔으니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위사람들을 교화시켜 존경 받은 정난주 마리아 묘(2.8㎞)→추사의 애제자인 허련(1808~1893)이 스승을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이 있는 남문지못(5.1㎞)→단산과방사탑(6.1㎞)→세미물(6.6㎞)→대정향교(6.7㎞)를 거쳐 다시 제주추사관으로 돌아오는 약 8㎞의 순환코스다. 도보로 약 3시간 소요된다.

 

 

인연의길은 추사의 한시, 편지, 차 등을 통해 추사의 인연들을 떠올리는 길이다. 제주추사관을 출발해 수월이 못(1.1㎞)→추사와 감귤(1.7㎞)→제주 옹기박물관(3.2㎞)→노랑굴→검은굴→추사와 매화(4.3㎞)→제주의 용암지대에 만들어진 특이한 숲으로 추사가 “밀림의 그늘속에 하늘빛이 실낱만큼 보였다”고 말한 곶자왈(5.6㎞)→추사와 편지·추사와 말(7.5㎞)→추사와 차(오설록 녹차밭·8㎞)를 거쳐 다시 제주추사관에 도착한다. 길목에 제주 옹기를 만들었던 도요지와 박물관이 있어 제주의 옹기 문화를 함께 만날 수 있다. 8㎞ 남짓한 코스로 역시 약 3시간이 소요된다.

사색의 길은 산방산의 웅장함과 안덕계곡의 경관을 따라 걷는 길이다. 바다, 오름, 계곡의 경치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대정향교를 출발해 100개가 넘는 호를 가진 추사의 다양한 도장들을 돌에 새긴 모습을 볼 수 있는 추사와 전각(0.2㎞)→추사와 건강(2.6㎞)→추사와 사랑(4.9㎞)→추사와 아호(5.3㎞)→추사와 창천·창천유배인들(10.1㎞)을 지나 대정향교로 돌아오는 약 10㎞에 이르는 코스다. 약 4시간이 소요된다.

추사 유배길 조성을 주도한 제주관광공사 융복합사업단 오창현 단장은 “한양에서 가장 먼 곳으로 내려와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집념과 사색으로 역사적, 문화사적으로 걸출한 성과를 일궈낸 추사를 기리고 그 가치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추사와 관련있는 장소들을 연결한 추사유배길을 조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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