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영상 증거 있는데, 피해자 몸에서 약물 검출 안됐다며 수사 밍기적
GHB(물뽕) 빠르게 흡수 후 배설...피해 인지는 사건발생 2주 후

[우먼컨슈머= 김아름내 기자] 불법촬영, 준강간 사건에서 약물 사용이 의심됐으나 피해자 몸에서 약물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기소되지 않은 사건이 있다. 

지난해 7월 발생한 이 사건의 가해자는 믿었던 남자친구였다. 사건 발생 후 2주가 지나 가해자 휴대폰에서 자신의 나체 사진과 영상을 보게 된 피해자는 경찰에 신고, 가해자를 고소했다.

원활한 수사를 기대했던 피해자의 생각과는 달리 수사는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피해자 몸에서 약물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버닝썬 사건 이후 알려진 물뽕(GHB)의 경우 체내에 흡수돼 혈약에서 30분 이내 소변에서 1시간 내 최고 농도에 도달했다가 배설된다. 피해자는 사건이 발생한 2주 후 피해를 인지하게 돼 약물이 검출될 리 없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사진, 영상 업로드·다운로드를 했을 것으로 의심하고 경찰에 노트북 조사를 요청했으나 경찰은 압수수색이 아닌 '임의제출'을 통보했다. 가해자가 노트북이 '멸실(파손)'됐다고 알리면서 피해사실을 입증할 수 있던 하나의 증거는 사라지게 됐고 피해자의 의심은 의구심으로만 남게 됐다.

(사진= 김아름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5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약물성폭력 확보된 증거를 면밀히 검토할 것을 경찰에 촉구했다 (사진= 김아름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5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약물 성폭력 의혹 제기와 함께 경찰에 사진, 영상 등 확보된 증거를 갖고 수사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제출된 가해자 핸드폰 포렌식 결과에서 피해당일 카카오톡과 페이스북, 메일 등을 통해 가해자가 전송과 내려받기(다운로드)를 반복한 것이 확인됐다.

유호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는 "(피해자에게)약물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해의 성폭력 혐의를 부정하는 유일한 증거가 될 수 없다"면서 "피해자 진술, 피해자 심신 상태가 의심되는 영상 등을 통해 약물이 사용됐다는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가해자의 휴대폰 포렌식 결과 가해당일 SNS로 누군가에게 사진을 전송했던 흔적, 파일 경로값에 카카오톡, 페이스북 등의 단어가 포함돼있다"면서 "플랫폼을 통해 촬영물 유포가 있던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상황이지만, 경찰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유포 관련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 활동가는 "피해자는 담당수사관에게 가해자의 노트북을 압수수색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수사관이 임의제출을 요구하면서 중요한 증거자료가 확보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사진= 김아름내)
불법촬영을 동반한 준강간 사건을 엄정 수사할 것을 촉구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단체의 기자회견이 15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열렸다. (사진= 김아름내)

김태옥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준강간 사건의 피해자는 심신상실, 항거불능의 상태가 확인되더라도 '만취한 줄 몰랐다', '합의하여 성관계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가해자가 주장하면 범죄 책임을 규명하는 일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소장은 "본 사건 피해자는 피해당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가 가해자 휴대폰에서 나온 불법촬영물을 보고 자신에게 성폭력피해가 있었음을 확인했다"면서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였는가'라는 성인지적 관점으로 사건의 실체를 들여다봐야한다"고 강조했다.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피해지원팀장은 성폭력 사건 수사에서 벌어지는 허점을 지적했다.

김 팀장은 "가해자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수사가 종결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모르는 또 다른 핸드폰을 제출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고 "즉각적인 압수수색이 이뤄지지 않아 가해자가 증거인멸을 시도하고 전자기기를 제출하기도 한다. 수사기관이 구글 드라이브 등 온라인 저장공간까지 들여다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분명 피해경험자 본인의 사건인데도 사건 대응 과정에서 소외되기 쉽다. 피해경험자가 닿을 수 없는 곳을 수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A씨는 대독을 통해 "약물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소조차하지 않는 수사기관의 방관하는 관행을 끊어달라"고 호소했다.

A씨는 "피해자가 피해를 겪고도, 그것을 입증할 명백한 증거물이 존재함에도 피해사실을 사회가 정한 사법제도 시스템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힘든 일을 줄 꿈에도 몰랐다"면서 "범국가 차원의 협의체를 구성하여 약물에 의한 성폭력이 의심되는 중강간 성폭력사건을 해결해달라"고 촉구했다. 

한편 버닝썬 사건 후 경찰청은 약물관련 수사지침서를 개정했다. 'GHB(물뽕) 증상'은 ▲주변 사람과 정상적으로 대화하지만 잠든 후 깨어나면 전혀 기억 못함 ▲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름이다. 

버닝썬 사건 수사 당시 한 경찰 관계자는 GHB 검출이 쉽지 않지만 마약류는 투약, 소지, 제조, 판매, 유통 등으로 처벌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약물이 체내에서 빠져나가 검출되지 않더라도 다각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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