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명소들이 오전 10시 정도에나 여니 느지막이 일어나 오르후스 시내 구경을 나섰다. 내가 묵는 시티슬립인 인근에 옛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포석을 깔아놓은 광장이 있는데 이 주변으로 주요 명소들이 몰려있다. 고풍스런 오르후스 극장은 9월에 있을 극장콘서트 모차르트광고가 한창인데 극장 콘서트는 어떤 장르인지 궁금해진다.

모차르트로 분한 배우 사진이 걸려있는 걸 봐서는 오페라보다는 캐주얼한 형식의 공연인가보다. 이 건물의 압권은 삼각지붕 꼭대기의 악마형상 돌조각. 바로 맞은편에 오르후스 대성당이 있는데, 예술이 가지고 있는 유혹적이고 쾌락적인 면을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다. 카메라 클로즈업 기능을 이용해 확대해 보니 뿔이 달리고 박쥐 날개를 단 악마는 꽤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천사와 성인들이 보호하고 있는 교회 바로 옆에서 시위라고 하고 있는건가 싶다.

1201년 지어진 대성당은 덴마크에서 가장 긴 성당이라고 한다. 덴마크어로만 안내가 붙어있는데 영어와 같은 그리스·라틴어원 단어들이 많아 대략 짐작해보니 51~930일 사이에는 평일 오전930~오후4시 개방한다. 화요일만 오후1030분 문을 연다. 하필 오늘이 화요일, 문이 잠겨있어서 이웃한 여성박물관으로 바로 이동했다. 페미니즘은 내 관심사중 하나로 무척 기대했던 곳이다.

여성만의 역사를 전시해놓은 여성박물관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고 여권 선진국 북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행을 떠나기전 조사해본 바로는 노르웨이 소냐 왕비에 의해 1995년 세워진 국립여성박물관이 Kongsvinger 지역에 있고 (홈페이지는 노르웨이어, 영어, 일본어로 꾸려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여성단체도 여성박물관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고는 한다.

여성박물관 입장료는 45크로네. 18살 이하는 무료입장이 가능하고 본래 월요일 휴관하는데 7,8월에는 월요일에도 문을 연다. ~일요일 오전10~오후4시 오픈하고 수요일에는 오후8시까지 연다. 1857년 지어진 옛 시청건물에 입주해 있는데, 경찰서로도 이용돼 지하층은 감옥으로 사용됐었단다. 전시물은 단출한 편이지만 신분증을 맡기면 손바닥만한 디지털기기를 주는데, 이어폰을 꽂으면 영어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보충화면이 나타난다.

1층에서 열리고 있는 소녀와 소년들의 이야기들이라는 전시는 방법도 굉장히 흥미로운데 벽에 꽂혀있는, 지난 100년간 실존했던 각 시대별 아이들의 이야기가 적힌 카드를 뽑아들고 전시실로 들어가 그들이 사용했던 물건을 번호에 적힌대로 찾아보는 식이다. 우연히 나와 생일이 같은 소녀의 카드를 뽑게 됐다. 1945214일생인 로테.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에는 남성본위의 역사서술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공적이 드러나있다. 사냥을 나간 남성들 대신 집안일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고 식물을 채집했던 여성들이 질그릇을 개발하고 동물들을 가축으로 키우기 시작하며 문명 태동의 큰 부분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전시물보다는 전시안내책자가 더 충실한 편인데 1970년대 본격적 여권운동의 영향으로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고, 동등한 임금을 받을 수 있게되고 18772명의 여성이 겨우 대학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현재는 여학생들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주류로 자리잡게 됐고, 1924년 덴마크 첫 여성장관이 나왔고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계속해서 여권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일반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구술한 녹음을 들어볼 수 있는 전시실도 있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여성주의적 시각을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2층에는 덴마크 역사속 여왕 등 주요여성인물들에 대한 전시가 85일까지 이뤄지고 있는데 내 눈을 더 사로잡은 것은 예술작품 전시다. Marit Benthe Norheim이라는 노르웨이 여성작가의 라이프 보트프로젝트다. 덴마크 배 디자인 회사의 참여로 실제 스칸디나비아와 유럽 일대 바다와 강에 띄워 판도라의 상자같은 보석함을 싣고 일주했던 여성의 형상을 한 3대의 흰 보트의 모형을 전시해놓았다. 불쑥 솟아나온 여성조각의 배 부분은 무엇이든 포용하는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킨다.

조선 관련 세계적 수준의 바이킹 후예와 여권 선진국으로서의 페미니즘적 관점이 혼합된 컨셉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꼭대기층에는 노년에 접어든 두 덴마크 여성 아티스트의 유화와 세라믹 도화(陶畫) 전시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벽과 천정에 나무 기둥이 그대로 드러낸 다락층의 전시공간도 무척 낭만적이라 마음에 든다. 덴마크적 발랄함과 고유의 하늘색을 연상시키는 색채가 인상적이다.

별관에는 레지스탕스 박물관이 있는데 영어식으로는 점령기 박물관이라고 해석된다. 오르후스는 1940~1945년 독일군에게 점령을 당했는데 이 건물은 게슈타포 본부로 사용됐다고 한다. 역시 일제의 잔인한 식민지 통치 시절을 겪었던 한국인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없다. 입장료 30크로네로 역시 18세 이하는 무료. 6~8월 제외한 월요일은 휴관하고 평일 오전 11~오후4시 오픈한다. 들어가자마자 체포된 레지스탕스를 가두는 좁은 감옥이 나오고, 고문당한 덴마크인의 자료사진도 전시돼있다.

수갑을 뒤로 채우고 엎드리게 해 등과 엉덩이를 구타해 검게 멍든 사진 등으로, 전반적으로 나치 치하에서의 오르후스시민들의 공포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독립기념관과 학교 수업을 통해 일제의 잔인한 고문행태를 보아온지라 이 정도면 양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외에 독일군의 제복, 무기, 유대인 수용소의 죄수복, 낙하산천으로 만든 웨딩드레스 (소설 부베의 연인에서 세계2차대전 당시 유럽여인들이 낙하산천으로 드레스를 만들어입는 에피소드가 나오는 걸 읽은 기억이 났다),

레지스탕스들이 발행하던 허가돼지 않은 인쇄물 등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물건들이 잘 보존돼있다.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은 많은 수 처형됐는데 그중 한 여인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이 정보원 여인은 그림을 즐기는 게슈타포를 위해 누드모델까지 서줬고, 그 증거사진과 스케치도 전시돼있다. 2차대전 종전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56년 결국 풀려났다고. 일제치하의 우리의 모습을 되비쳐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나, 모두 덴마크어로만 안내문이 붙어있고 번호별로 영어로 번역한 폴더를 주는데 대조해보면서 관람하기가 조금 번거로웠다. 당시 시대를 담은 영화장면들도 상영되고 있는데 역시 덴마크어로만 자막없이 틀어준다.

사라진 관광안내소, 표지판은 그대로

대성당으로 다시 왔더니 이번엔 문이 열려있다. 내부가 온통 새하얗게 칠해져 있고 금박을 씌운 제단화와 조각으로 치장돼있어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알고보니 평민들에게 성서 속 일화들을 알려주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화려한 프레스코화들이 종교개혁 이후 로마가톨릭교회의 잔재로 여겨져 백색도료로 덮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중 많은 벽화가 다시 발굴돼 복원된 것이라고 하는데 부분적으로만 드러나있어 전체를 다 알아보기 힘든 것들도 있다.

파이프오르간도 덴마크 최대 크기라고 한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성당 내부에 군데군데 무작위로 놓여있는 시멘트 조각들. 다소 투박하게 등신상으로 만들어진 16개의 천사상인데 바퀴를 달아 이동할 수있도록 해놨다. 입구 쪽에서 안내전단을 찾았는데 롤링 엔젤스는 작곡가 Gier Johnson이 곤충들과 새들의 소리를 바탕으로 스피커를 통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주형된 것으로 오슬로, 북 스코틀랜드, 런던 등을 거쳐 덴마크까지 와 길거리에서 굴려지는 퍼포먼스에 이용돼 왔단다. 3개국을 돌고 돈 롤링 천사들을 내가 여기 와서 만난 것이다.

각각의 거리에서 남녀노소가 참여해 이 천사들을 굴리는 사진이 실려 있는데, 따로 설명을 해놓지는 않았지만 여성박물관에서 본 라이프보트 전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같은 홈페이지 주소가 인쇄돼있다. 그러고보니 라이프보트들과 천사들의 외형 색과 질감이 비슷하다.

구름한점 없는 하늘은 쏟아져 내릴 듯 푸르디푸르다. 오후로 들어서니 높게 떠오른 태양은 따가운 햇살을 거침없이 쏘아댄다. 7월말로 들어섰고 계속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으니 더워지는게 당연지사. 햇볕이 무척 따갑게 느껴지는 것이 북유럽도 제법 여름답다 싶다. 지도에는 대성당 맞은편에 바이킹 박물관이 있는데 당최 눈에 띄지 않는다. 알고보니 노르데아 은행 지하에 1964년 이 건물을 지을 때 발견된 바이킹마을 유물들을 보존해놓은 곳으로 조그마한 표지판만 붙어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은행으로 들어가는 유리문을 여는데 후끈거리는 공기가 확 몰려나온다. 미국처럼 냉방에 적극적이진 않아도, 이 정도로 더위가 이례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은행 영업시간에 맞춰서만 문을 여는지 오전 1015~오후5시까지 무료로 구경할 수 있다. 950년경의 삶의 모습을 복원해놓은 초가집, (고대 북유럽 문자)이 새겨져있는 바위와 함께 발굴된 유골도 부장품과 함께 전시해놓았다.

내친김에 서너 블록 떨어져있는 우리성모교회까지 가보기로 했다. 교회 인근 고급가구점이 세일을 하고 있어서 창밖에서 전시된 스칸디나비아풍 의자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묻지도 않았는데 교회 찾는거냐며 입구는 어디에 있고 어쩌고저쩌고 한다. “나 교회위치 알아하면서 감상을 지속했다. 날씨가 갑자기 뜨거워진 탓에 불쾌지수도 올랐고 이곳 노인들의 동양여인에 대한 선입견을 알기에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이제는 좀 짜증이 난다.

우리성모교회는 대성당에 비해 자그마한 크기라 오래된 나무냄새와 함께 아늑한 느낌을 준다. 제단 위에는 작지만 금박을 입힌 목부조가 화려하다. 인테리어는 어딘지 모르게 바이킹에게서 온 이교도적 느낌이 있다. 가슴을 다 드러내고 술잔을 든 여인을 그린 그림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처럼 보이고, 금으로 만든 성수그릇 받침의 철제 다리에는 용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교회의 명물은 1060년경부터 존재해온 지하묘실. 제단 아래로 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벽돌을 쌓아만든 동굴같은 내부가 드러난다. 껌껌해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데 여러개의 벽돌 아치를 지나면 끝쪽에 역시 벽돌로 만든 제단과 십자가가 나타난다.

관광 성수기에도 보통 오전 10~오후 4,5시 사이에만 여는 곳이 많으니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 돌아보려면 점심시간이라도 아껴야한다. 오르후스에 머무르며 내일은 모에스고르 선사박물관, 모레는 레고랜드에 갈 예정이라 교통편 등도 미리 알아봐야한다. 여행기를 쓰기 위한 자료를 얻을 겸 숙소로 돌아와 사다놓은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이번에는 어제 리셉션에서 받은 지도에 나와있는대로 시청에 있다는 관광안내소를 찾아나섰다. 시외버스정류장과 기차역 쪽 길을 따라가니 덴마크를 대표하는 야외박물관 덴 감레 비(올드타운), 아로스 오르후스 미술관, 오르후스 콘서트홀과 함께 기차역과 관광안내소를 표시하는 마크('i')가 표시된 교통표지판이 나온다.

길을 가다보면 곳곳에 안내소 표시안내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어제 분명 기차역 인근 관광안내소가 1년전쯤 문을 닫았다는 것을 확인한터라 좀 화가 난다. 갑자기 기자정신이 불쑥 솟아오르며, 일반시민들은 관광안내소에 갈 일이 없으니 알기 힘들겠지만 저런 건 언론에서 지적해 고치도록 했어야하는 거 아닌가, 여기 언론인들은 뭐하는거야,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심가는 버스가 다닐 만한 길이 아니라 내내 걸어다녀야하고 날씨가 너무 더우니 점점 더 지쳐가며 괜히 더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걸어걸어 시청까지 갔더니 막 오후4시가 지난 시간이라 문을 닫았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없는 짧은 노동시간이다. 유리문에 새겨진 안내를 보니 평일에만 문을 여는데 오전10~오후4시 오픈하고 목요일만 오후6시까지 연다. 내가 그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으니 한 친절한 부인이 뒤쪽에 열린 문이 있으니 가보라고 알려준다. 우뚝 솟은 시계탑이 인상적인 오르후스 시청사는 덴마크 디자인과 건축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아르네 야콥센과 에리크 뮐러가 설계한 건물이라고 한다. 너른 시청건물 반대쪽 문을 찾아 추적추적 걸어가니 중년 경비원이 한참 다른 직원과 잡담하고 있다.

잡담이 끝나길 기다려 관광안내소에 대해 물어보니 그것 없어진지 한참 됐어, 인터넷이 있는데 거기서 찾으면 되잖아한다. 눈치를 보아하니 지도만 보고 안내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돼 귀찮은 모양이었다. 호스텔에서 가져온 지도를 보여주면서 여긴 시청에 안내소가 있다고 돼있는데하니, 이건 옛날 지도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도책자에서 새 지도라며 한장 뜯어준다. 그런데 이 지도에는 역시 문을 닫은 기차역 옆 안내소가 표시돼있다. 이건 뭐냐고 했더니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보인다.

수정되지 않은, 그것도 일관성 없는 지도들만 비치돼있고 어제부터 애타게 찾던 안내소는 이 도시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덴마크에서는 수도 코펜하겐에 이은 제2의 도시다. 시의 관광정책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안내소 하나쯤은 유지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디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이 안내소인게 인지상정인데, 재정을 아끼고자 한 것인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시도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높은 인건비 때문에 여기저기 무인화를 서두르는 걸까?

인터넷으로 찾아보라는데 세계적 수준의 IT도시인 서울에서 온 내가 보기엔 무선인터넷이 제대로 보급된 것도 아니고, 속도가 어찌나 느린지 갑갑증이 올 지경이다. 여행자가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다 지참하는 것도 아니다. 내 삼성 갤럭시1도 여행중에 마침 맛이 가버려 툭하면 다운되는 상황이다. (그나마 관광안내소에서 만든 작은 소책자를 이튿날 호스텔 리셉션 창구 구석에서 체크아웃을 하다가 발견했다. QR코드가 인쇄돼있긴 하다) 역시나 이런 점에 대해서 현지 언론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찌됐든 물어볼 데가 없으니 경비원에게 다시 모에스고르 박물관에 가려는데 몇 번 버스를 타야할지, 어느 쪽 방향의 정류소에서 타야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아느냐고 했더니 버스기사에게 물어보란다. 기차역부터 시청 앞 사이에 버스정류장만 못돼도 스무 개는 되는 것 같던데 어느 버스기사에게? 운행으로 바쁜 버스기사에게? 승객들 줄선 사이로?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이 도시에는 역시 차표 파는 유인 부스 하나 없다.

아로스 미술관 옥상의 무지개 터널

시청을 돌아가면 큰 공원이 나오고 콘서트홀과 아로스 미술관이 나란히 있다. 아로스는 네모나게 각진 건물 위에 무지개색 둥근 환을 얹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초입의 안내판을 보니 월요일 휴관하고 화,,,일요일은 오전10~오후5, ,목요일에는 오후10시까지 연다. 폐관 시간이 다돼가는데 날을 잘못 잡았다. 오르후스 도심을 하루에 둘러보려면 수요일이 적당한데 그랬다. 이날은 대성당에서 오후5시 오르가니스트의 무료공연도 있고 주요 뮤지움들도 늦게 까지 문을 여는 날이다.

직원들도 갑작스러운 더위에 꽤 지쳐 보인다. 기온을 느끼는 것은 상대적이다. 그동안 춥게 느껴질 정도의 날씨에서만 돌아다니다가 영상 27도까지 치솟은 날씨는 갑자기 열대지방에라도 떨어진 듯한 체감인데, 코펜하겐 기준으로 가장 더운 7월 최고기온이 평균 22도 정도라는데 이 정도면 이들에게도 몹시 뜨거운 날이다. 잠시만 둘러보기로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인 10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레인보우 파노라마라는 환모양의 투명 터널이 있다. 터널은 프리즘처럼 무지개빛 투명 플라스틱 창으로 쭉 이어져 있어 따라 걷다보면 각기 다른 색으로 덧칠된 도시를 감상할 수 있다.

 

 

신기한 체험이긴 한데 오늘 날씨 때문에 터널 안의 공기가 숨이 턱턱 막혀온다. 9층은 터진 옥상으로 이곳으로 내려오니 좀 시원해진다. 기와지붕들로 빽빽한 도시 너머로 먼 바다의 물마루가 푸르게 치솟아 있다. 화물선이 주로 드나드는 항구로 누군가의 노동의 장이다. 내려오면서 보니 미술관은 내부는 나선형의 흰 경사로로 꾸며져있어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연상된다. 시간이 얼만 남지 않아 1층에 전시중인 이 미술관의 명물 소년’(1999년작)만 구경하고 밖으로 나섰다. 5m 높이의 이 동상은 반바지만 입고 쭈그려 앉아있는 소년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 생생한 표정과 압도적인 크기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버스를 알아보러 시청쪽으로 다시 나오는데 노르웨이에서 많이 본 레마1000(REMA1000) 슈퍼마켓 체인이 보인다. 따가운 햇빛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들어가서 몸에 바르기 위해 니베아 선블록을 하나 충동구매했다. 찾는 이들이 많은지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이는곳에 전시해놨다. 크기가 꽤 커서 짐이 될 테지만 손목부분의 따거움과 가려움을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아까 숙소에 들르기전 마가신이라는 대형 백화점이 보이기에 들어가 시세이도에서 얼굴에 바르는 선블록을 이미 하나 구입한 참이기도 하다.

버스노선을 체크해보려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 2권에는 모두 모에스고르 박물관을 가려면 기차역 앞에서 6번 버스를 타라고 돼있다. 아무리 찾아도 6번 버스가 서는 정류장은 없기에 물어보니 이 노선은 없어졌다고 한다. 결국 각 번호별 버스가 서는 부스마다 뒤져서 시청앞에서 18번 버스를 타면 된다는 걸 발견했다. 시간표까지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놓으니 안심이 된다. 계획한 일정대로 가보고싶은 곳에 꼭 가야겠다는 집념!

시청 뒤 너른 공원의 벤치에 지친 다리도 쉴 겸 현지인들처럼 좀 앉아서 미적거리다가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보행자전용도로를 걸어 숙소로 향했다. 주요 쇼핑거리이기도 한데 오후 530~6시 사이에 다 폐점한다. 날이 아직 훤해 이 거리를 다니는 이들도 많은데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아 언밸런스한 분위기. 오후 8, 늦게는 10시까지 문을 여는 상점들에 익숙해진지라, 대체 직장인들은 언제 쇼핑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여가권이 철저히 보장된 이 나라에서는 이것이 별 불만없이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도시 동서로 뚫려있는 오보울렌바르덴 운하까지 왔더니 운하변 레스토랑과 카페에는 더위를 피해나온 이들로 북적댄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야외테이블은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자리 잡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호스텔에서 한방을 쓰는 독일인 여학생은 날씨가 더워 맥주 한잔 하러 나간다고 나서는 참이다. 조각처럼 작고 예쁜 얼굴을 한 예쁜 얼굴의 석사과정 독일 여학생은 여기 오기전엔 덴마크에서는 만날 비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해가 짱짱하냐며 다 탔다며 벌개진 목덜미를 보여준다. 학생도시답게 스콜레 거리 쪽에 펍과 클럽들이 많다는데 혼자 나가 즐길 셈인가 보다. 그녀의 젊음이 부럽다. 침대 하나에는 새로온 손님이 누워서 쉬고 있다. 코펜하겐에서 온 덴마크 여인이다.

중년의 그녀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 부드러운 얼굴선과 활기에 넘치는 표정 덕분에 나이가 잘 느껴지지 않는 그녀는 뮤지션이라는데 전에 오르후스에서 오래 살았다며 친구를 만나러 가기전 하룻밤 여기서 머문단다. 기타와 사우스아프리카에서 왔다는 북을 가지고 왔는데 내가 관심을 보이자 직접 북을 두들기며 연주를 보여준다. 세계에서 행복지수 1,2위를 다투는 나라의 국민이다. 별로 가진 것 없이 싸구려 숙소를 전전하는 무명 예술가지만, 영혼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녀에게 오르후스에 관광안내소가 아예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하니 예전에 큰 게 있었는데 없어졌냐며 놀라워한다. 그러면서 지도 위를 짚어가며 걷기 좋은 해변과 식물원, 큰 공원들을 추천해준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 호스텔 공동부엌에도 행복하게 여행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요란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요리를 해먹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식비를 아낄 셈으로 오븐에 빵을 잔뜩 굽고 있는 레즈비언 커플도 있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삶을 즐길 여유가 있는 유럽인들의 한 단면이다. 마냥 부러운 모습들이다. <2012724일 덴마크 제2도시 오르후스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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