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대구은행은 지방은행 중 가장 먼저 설립됐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교서가 발표된 뒤 일주일 후인 1월23일 대구상공회의소 주축으로 지역경제인대표 43명이 만났다. 

이들은 가칭 ‘대구은행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날로 대구상공회의소회장인 여상원씨와 메리야스업대표인 김준성, 기계업대표 오일룡 등 대구지역의 각 업종을 대표하는 15인의 발기인을 선출했다.

78년에 발행된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1967년 2월18일 제2차 발기인 총회에서는 정관을 확정하고 같은 날 대구은행설립내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3월24일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내인가를 얻었다.

그러나 은행 설립은 주식공모의 부진과 주금납입의 저조로 개점일자는 여섯 차례나 연기되고 자본금 또한 당초계획 보다 축소되면서 1967년 9월19일이 되어서야 주금납입이 완료됐다.

 1978년 당시 대구은행 본점 (사진= 78년 한국금융30년사)

9월26일 열린 창립주주총회를 통해 은행장에 김준성, 전무이사에 남옥현, 상무이사에 김현기, 이사에 오일룡, 김석문, 상임감사에 권승호가 선출됐다. 

10월7일 10개 지방은행 중 가장 먼저 대구은행 문을 열며 6인의 임원과 37명의 직원이 업무의 돌입했다. 

대구은행의 설립은 지방금융사에 하나의 큰 사건으로 기록됐다. 일제 강점기 일본 독점자본이 지배하에 있던 전국은행에 흡수되어 명맥이 끊어진 후 50년대 말 서울은행의 출현으로 잠시 등장하다가 사라진 지방은행이 재현된 것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한 민간자본에 의한 상업은행의 탄생일 뿐 아니라 주주들이 지역사회 개발에 직접 참여한다는 애향심으로 뭉친 자본의 집결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대구은행은 ‘친절, 신속, 정확’을 행훈으로 정하고 지역민과 밀착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결과 행세는 날로 성장했다.

자본금은 1968년 4월1일 제1차 증자를 단행한 이래 78년에는 90억원으로 늘어났으며 창립 후 10년만에 60배나 신장했다.

대구은행은 자본금이 이처럼 대형화 되는 과정에서도 독과점 주주 출현을 배제하고 주식의 대중화를 지속해왔다.

창립 당시 주주수는 124인에 불과했으나 8차 증자를 끝낸 1978년에는 2천611명으로 늘어났다.

창립 시 대구상공회의소의 일부를 전세로 얻어 출발했던 대구은행은 본점 건물을 1969년 10월15일 대구시 중앙통에 당시 시내에서는 최고층 빌딩으로 준공했으나 인원 및 기구의 계속되는 확대로 포화상태에 이르러 1천여평에 달하는 부지를 매입하여 본점 신축이 추진됐다.

창립이래 7년 6개월 동안 초대은행장을 맡았던 김준성 행장은 제일은행장으로 보임됨에 따라 당시 남보현 전무가 76년 5월 주주총회에서 2대 은행장으로 선출됐다.

78년 당시 대구은행에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주주총회와 최고업무집행기관인 이사회 및 인사, 업무개선, 저축추진, 서정쇄신추진, 새마을운동 추진 등 5개위원회와 부점장회의가 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위원회를 두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대구은행은 창립당시 총무부 1개 부서만으로 출발했던 본부부서는 비약적인 업적신장과 경영여건의 변화로 1977말 현재 9부2실22과로 확대됐다. 점포망으로 본점영업부 1개소를 갖고 발족했다. 

1968년 1월12일 서지점 신설을 시작으로 매년 점포를 증설한 결과 77년 말에는 45개점포망(지점 28개소, 예금취급소 1개소, 간이에금취급소 16개소)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대구은행의 점포망 구축은 대구시내 전역에 골고루 분포했다는 점에서 시중은행과는 달랐다. 이는 역사가 일천한 대구은행이 대구시내 구석구석과 경북도내 중소도시에 산재한 점포망에 힘입은 바 크다.

지역에 밀착된 소형점포주의를 취함에 따라 이제까지 비금융권으로 방치되어 왔던 지역민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금융기관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고 밀접한 변두리 점포망은 지역의 영세유휴자금을 흡수하여 영세상공인에게 산업자금으로 제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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