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해방 전 1895년 대한천일은행, 1903년 한성은행 등 민족은행 등이 잇달아 설립됐으나 은행들의 업무가 도시에 국환돼있다는 지적에 따라 지방금융의 유통과 농업에의 신용제공을 위해 특수한 금융기관 설립이 요청됐다.

농업협동조합중앙회 본점사진=한국금융30년사(1978년)
농업협동조합중앙회 본점사진=한국금융30년사(1978년)

78년에 발행한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시대적 요청에 따라 1901년에 농공은행조례가 발포됐으며 이어서 전국 7개 지역에 농공은행이 설립됐다.

1907년에는 지방금융조합령에 의해 근대적 협동조합금융을 표방한 금융조합이 각지역에 창설됐다. 1년 뒤인 1908년에는 장기식산자금의 공급과 척식사업의 추진을 위해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농업금융제도가 출발했다.

해방전에는 농공은행, 금융조합 및 동양척식회사의 세 기관이 당시 농업금융의 주축이 되었다.

농공은행은 일본정부의 재정자금과 민간자금을 재원으로 부동산담보에 의해 중장기의 농공업자금을 융자했다. 

금융조합은 조합금융방식에 의해 주로 소농이상의 농민에게 단기영농자금을 공급했다.

동양척식회사는 금융부를 통해 개척사업을 펼치면서 개척민, 농업단체 및 농업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융자에 나섰다.

한편,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령 공포에 따라 각지의 농공은행은 합병되어 조선식산은행으로 발족했다.

조선식산은행은 농업금융업무에 있어 중소농에 대한 직접융자는 금융조합에 일임했다. 또 사채발행자금과 일본대장성예금부의 자금차입에 의한 각 금융조합에 자금을 공급하는 중앙은행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부동산은행으로서 동양척식회사와 제휴하여 대지주와 농업단체에 대한 융자를 실시했다.

식산은행과 금융조합으로 연결된 농업금융기관은 총독부의 보호육성 아래 활동이 크게 확대됐고 우리나라 농업기반을 잠식하게 됐다. 

1930년에 농업공황이 야기되면서 일본에서 한국미배척운동이 일어났다. 한국 농촌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면서 농업신용제도의 개편 강화가 불가피해졌다. 

금융조합은 조직강화를 실시하며 종래 융자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가난한 영세 농민층을 조합원으로 흡수했다.

이어서 1933년에는 조선금융조합연합회령이 발포되어 종래 각도별로 조직되었던 금융조합연합회와 중앙의 금융조합협회 및 식산은행의 금융조합중앙금고과가 흡수되면서 단일중앙연합기구가 결성됐다.

이로써 금융조합은 막강한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금융조합연합회 창설 이후 금련은 조선금융채권의 발행에 의해 융자재원을 조달 할 수 있게 됐으며 1935년에는 처음으로 제1회 금융채권 328만원을 발행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후 일정말기의 금융조합은 전비조달을 위한 국채의 인수기관화하여 농촌으로부터 자금흡수에 전념하면서 농업금융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되었다.

우리나라는 마침내 해방을 맞이 했으나 경제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농업금융을 담당하던 금융기관들은 자금난 봉착으로 대출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급기야 금융조합들은 1947년부터 조직망을 가동하여 국민저축운동과 출자증가운동을 전개했다. 

금융조합들은 미군청의 요청에 의해 1946년 4월부터 모직물외 6종의 생필품의 구매 보관 및 배급업무를 단행했다. 1949년 7월에는 기존 대한농회에서 담당하던 비료조작업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또 1949년 10월에는 대한식량공사에서 담당한 정부미곡조작업무가 공사 해체와 더불어 금융조합에 이관되었고 1949년 12월에는 대한농회가 취급하던 약공품업무를 이관받았다.

그러나 금융조합은 그간 정부대행사업을 취급하던 업무가 종료되자 마자 급격히 위축됐다.

조선식산은행 또한 해방과 더불어 역할이 상실함에 따라 마침내 1953년 한국산업은행법이 제정 공포되고 1954년 한국산업은행으로 개편되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해방직후 1954년 11월 신한공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고율의 소작료징수를 통해 농민수탈을 지속하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아 해체됐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농촌금융업무의 확대를 위해 금융조합의 개편과 농업신용제도의 정비가 절실히 요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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