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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대] 한국금융역사를 면면히 지켜온 한국상업은행
  • 박문 기자
  • 승인 2020.06.03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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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구한말, 국가재정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에 따라 국가재정은 물론 원활한 상거래 지원을 위한 민족은행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창립79주년 맞는 우리은행 전신 상업은행 본점 건물/사진=78년 한국금융30년사 
창립79주년 맞는 우리은행 전신 상업은행 본점 건물/사진=78년 한국금융30년사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화폐의 융통 및 상무(商務)의 흥왕(興旺)’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족은행의 하나인 대한천일은행은 한국상업은행의 모체로 오늘날 우리은행의 모체이다.

1978년에 발간한 한국금융30년사에서는 한국상업은행의 성장과정을 창업기(1899~1910). 합병매수기(1910~1945), 발전기(1962~1974), 국제화기(1975~1977)로 구분했다. 한국금융 30년사 발간시점인 1978년은 한국상업은행이 창립79주년을 맞는 해였다.

창업기(1899년~1910)인 1899년(광무 3년) 1월30일 관리 및 실업가 중에서 민병석, 심상훈, 민영기, 유기환, 민병한 등 31인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13,800원의 납입자본금으로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 설립됐다. 그해 3월10일 초대은행장에 민병석이 취임함으로서 완전한 신은행의 성격을 갖추고 영업을 개시했다.

설립당시부터 정부로부터 태환권의 발행, 관금운송 등 특권을 부여받고 급성장한 대한천일은행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한국의 경제적 독립성이 상실된 다음해 1905년 일본에서 일어난 공황으로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시련을 겪었다.

1906년 6월 취체역에 김기영이 은행장대행으로 취임해 영업이 재개됐으나 은행경영에 대한 일본인들의 간섭이 사실상 제도적으로 보장된 조건 아래 영업이 재개되면서 순수한 민족은행의 성격은 부분적으로 상실됐다. 

합병·매수기(1910~1945) 시대에 따르면, 대한천일은행의 수난은 1910년 한일합병이후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하여 상호가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됐고, 1921년에는 은행장이 일본식으로 두취(頭取)로 변경됐으며 일본인 대주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최고경영자 자리의 일부를 일본인에게 내어 주어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식민지당국은 우리나라 금융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조선상업은행에 다수의 일본계은행을 합병시켰다.

1905년 12월 당시 재정개혁에 따른 금융계의 공황을 구제하기 위해 조진태 이외 38인의 발기인이 추진한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가 설립됐다. 그러나 동사는 경영난에 봉착하게 됐고, 조선상업은행은행으로서도 상품담보의 증가로 창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912년 합병했다.

또 일본인이 주동이돼 지방은행 성격을 띠고 1919년 4월에 신설된 순일본계은행인 원산상업은행을 1923년에 합병했다.

조선실업은행은 1920년 설립과 동시에 경성은행을 합병하고 1924년 조선상업은행이 합병됐다. 합병과 함께 조선상업은행은 조선실업은행의 본점 영업소로 이전했으며 최고경영층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1921년 평양은행을 합병함으로서 설립된 대동은행은 조선상업은행이 합병했다. 당시 평양은행은 1916년 삼화은행을 흡수했다.

1920년에 전라북도 한인실업가를 중심으로 서립된 삼남은행은 1928년 6월 조선상업은행에 합병됐다.

북선상업은행(北鮮)은 1918년 함흥지방의 실업인을 중심으로 설립된 한인계 지방은행이다. 이 은행은 1928년 3월창고업 및 그 부대업무를 목적으로 설립된 주식회사 북선상업사를 합병한 후 1933년에 조선상업은행에 합병됐다.

부산상업은행은 부산지방의 산업개발에 기여하고자 1913년에 설립됐으나 식민지 당국의 은행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에 의하여 조선상업은행에 매수됐다.

대구상공은행은 1920년 대구에서 일반은행업무를 취급하기 위하여 설립된 경일은행을 모체로 하고 있다. 1930년 경일은행은 경상공립은행을 합병했고, 1933년에는 다시 선남상업은행의 후신인 선남은행을 합병하고 상호를 대구상공은행으로 개칭했다.

대구상공은행은 1941년 식민지당국의 지방은행정비정책에 의하여 조선상업은행에 영업전부를 양도했다.

발전기(1962~1974)에 한국상업은행은 1962년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개발자금수요에 부응하면서 다른 일반은행과 함께 외국환업무를 취급하며 급성장했다. 

자본금은 1962년 3월 35억환으로 증자된 후 계속 증가했으며, 예금고도 1965년 5월 한국금융사상 최초로 100억 원을 달성하는 등 성장을 거듭했다.

이 기간 한국상업은행의 민영화라 할 수 있는 1961년 ‘부정축재환수절차법’ 제10조에 의하여 일반은행의 주식이 정부에 환수됐고 정부가 은행 경영에 깊이 관여하는 계기가 됐다. 은행의 공공성이 강조된 반면 관치금융의 시작이 됐다. 

국제화기(1975~1977)인 이 시기에는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한국상업은행은 1974년 12월 동경사무소 개설을 시작으로 1977년 뉴욕지점 포함하여 78년 현재 해외지점 1개, 사무소 4개, 연락사무소 4개를 두었다. 바야흐로 국제무대에 진출한 것이다.

1977년 12월말 현재 당시 해외 환거래은행은 892개에 달하는데 이중에서 예치환거래은행은 미국의 32개를 포함하여 37개에 달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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