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밀한 경제침략 추진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한 금융기관은 일본 제일은행이었다. 일본 제일은행은 1904년 구(舊) 한국정부와 국고금 취급에 관한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중앙은행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구 한국은행권 십원권(舊 韓國銀行券 拾圜券)앞면 : 주합루뒷면 : 채문1909년 7월 대한제국은 ‘한국은행 조례’를 공포하고 최초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설립하여 은행업무를 시작했다. 합병이후인 1910년 12월에 일원권, 오원권, 십원권 3종이 발행되었다. 구 한국은행권은 제일은행권의 화폐단위였던 '원(圓)'을 원(圜)으로 바꾸고 은행명칭, 휘장, 인장등을 바꾸어서 디자인되었다. (사진= 한국은행 화페박물관)
구 한국은행권 십원권(舊 韓國銀行券 拾圜券)앞면 : 주합루뒷면 : 채문1909년 7월 대한제국은 ‘한국은행 조례’를 공포하고 최초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설립하여 은행업무를 시작했다. 합병이후인 1910년 12월에 일원권, 오원권, 십원권 3종이 발행되었다. 구 한국은행권은 제일은행권의 화폐단위였던 '원(圓)'을 원(圜)으로 바꾸고 은행명칭, 휘장, 인장등을 바꾸어서 디자인되었다. (사진= 한국은행 화페박물관)

이어 1905년에는 화폐정리에 관한 업무를 위임받아 우리나라의 유일한 발권은행으로서 기능도 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의 권리에 속하는 은행권발행특권을 외국의 1개 민영은행에 맡길 수 없으므로 한국정부는 일본 총독부와 협의하여 1909년 7월 ‘한국은행조례’를 공포하고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78년에 발간 된 한국금융 30년사에 따르면, 1909년 10월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인 구 한국은행이 자본금 1천만원(萬圓)으로 업무를 개시한다. 이에 따라 일본 제일은행은 그때까지의 화폐발행액과 경성과 부산의 두 개 지점을 제외한 모든 지점과 출장소를 한국은행에 이양하고 일반은행으로 돌아간다.

그 후1910년 8월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일제는 본격적인 경제적 침탈거점으로의 금융제도 재편 작업에 들어간다.

그 첫 번째 단계가 1911년 3월29일 ‘조선은행법’을 공포하고 8월15일 시행되어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변경하게 된다.

한국은행 한규훈 차장이 발간한 조선은행 40년사에 따르면, 이날 설립했다고 아니하고 개칭했다고 하는 것은 조선은행 부칙에 연유한다.

“제43조 구한국 융희 3년 법률 제22호에 의한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이라 칭하고, 한국은행 설립일에 본법에 의하여 설립한 것으로 간주하며 한국은행이 한 행위는 조선은행이 한 것으로 간주한다. 한국은행에 관한 등기는 조선은행에 관한 등기로 간주하며, 등기부에 있어서의 은행의 명칭은 당연히 변경된 것으로 한다.
제44조 한국은행의 총재, 이사 및 감사는 조선은행의 총재, 이사 및 감사로서 취직한 것으로 간주한다.
제45조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은행권 및 그 발행으로 간주된 주식회사 제일은행의 은행권은 한국은행이 발행한 것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행의 모든 것은 조선은행으로 간주하여 한국은행은 사실상 말살된 것이다.

일제는 한국합병을 책동하면서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계획아래 한국은행을 설립하여 합병후에도 한국은행권을 발행, 이를 유통시킴으로서 순조로운 침투를 꾀했다.

조선은행권이 처음으로 발행된 것은 1914년 9월1일이었다. 이날 발행된 것은 100원권이었으며 1915년 1월4일 1원권, 11월1일 5원권 및 10원권이 발행됐다.

이에 딸라 조선은행은 구 한국은행의 모든 권리의무를 승계하고 구 한국은행의 과제이던 엽전과 제일은행권의 회수는 물론 각 지역에 있던 농공은행과 금융조합을 보조기관으로 활용하여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촉진시켰다.

당시 조선은행의 업무는 은행권발행, 국고업무, 지금은 매매, 정부대출, 공채매입 및 응모, 환어음 할인 등 일반은행 업무까지 망라했다.

제도가 완비되자 일제는 본격적인 식민지정책을 펼치게 된다. 조선은행은 일본의 식민지무역정책에 알맞도록 국내의 점포망을 정비 확장하고 일본의 주요 도시는 물론 멀리 만주와 몽골 그리고 구미지역까지 진출하여 일본 침략정책의 전초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가운데 조선은행은 날로 성장하게 된다. 조선은행은 그 업무가 확대됨에 따라 1920년에는 자본금이 8천만원까지 증가했지만 1차세계대전후인 1920년대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불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에 따라 1925년에는 다시 자본금을 4천만원으로 감자하게 된다. 이때에 일본은행과 일본 대장성으로부터 특별정리기금을 차입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선은행의 실질적인 관리기관이 일본 대장대신으로 넘어가게 된다.

더구나 이때에는 1918년에 설립된 조선식산은행 중심의 특수은행과 일반은행의 조직기반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중앙은행으로서 조선은행의 통제력 또한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그 결과 조선은행의 성격도 크게 변하여 일본 산업금융정책의 추진을 위한 현지 대행기관으로서의 자금지원 업무에만 국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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