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47)] 이승만, 한국 최초의 골프장을 세우다
  • 이인세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0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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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컨슈머 이인세 칼럼] 해방 후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골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1949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 기념 축하 연회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배석한 주한 외교 사절들에게 인삿말을 건넨다. “휴일에는 어떻게 소일들을 하십니까?”. 외교관들이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이때다 싶어 더 높아진다. “한국에는 단 한 군데의 골프장도 없어 일본 오키나와로 날아가 미군 기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옵니다.” 말인 즉슨, 한국에 골프장이 없어 외교관들이 가까운 일본에서 골프를 치고 온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오끼나와도 미군이 주둔할 당시 미군들에 의해 지어진 골프장이었으며 한국이야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제치하에 있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옆에 있던 총무처장에게 구두 지시를 한다. “한국에도 당장 골프장을 건설하세요.” 이승만의 즉각적인 지시로 한국의 골프장 건설은 지체 없이 전개됐다. 대한민국이 해방 된 지 꼭 4년이 지났지만 남북이 대처한 상황을 감안할 때,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우방 외교관들이 주말마다 자리를 비우게 되면 힘의 공백이 생기고, 이는 곧 북한에게 남침의 여지를 제공할까 우려한 때문이었다. 한국의 골프장은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로 그렇게 시작됐다.

물론 한국의 골프장이 1949년 처음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는 일본보다도 5년이나 이른 1897년 원산항 인근에 영국 세관원들이 6홀짜리 골프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21년 일본인들에 의해 용산의 효창원 코스도 만들어졌고, 영친왕도 이 곳에서 골프를 즐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4년 이 골프장은 청량리로 이전하면서 ‘경성골프클럽’으로 불리게 된다. 3년 뒤 다시 현재의 어린이대공원 자리로 옮겨 군자리 골프코스로 명명된 뒤 비로서 한국 골프의 기초인 서울컨트리클럽이 태동된다. 이후로 평양, 원산, 부산, 대구 등 전국에 여러 곳의 골프장이 만들어졌으나 2차세계대전의 여파로 일본에 의해 모두 비행장이나 신병 훈련장으로 대치되는 바람에 한국 내에는 골프장이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부관계자들은 곧바로 코스 복구에 착수했다. 은행에서 2백만 환의 소요 경비를 대출받아 군자리 골프장의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도 장비를 지원하면서 9개월 만인 1950년 5월 비로서 군자리 골프장이 제모습을 찾았다. 이제 주한 외교사절들은 골프로 인해 번거롭게 일본을 오가지 않아도 됐다.

1954년 군자리 골프장에서 열린 제1회 한국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토마스 메츠커가 우승을 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트로피를 받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었을까.
외교관들의 공백에 대한 그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은 군자리코스가 복원된지 정확히 한달 뒤였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6.25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북한이 남침을 하던 그날 새벽에 정부 고관들은 군자리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약 외교관들이나 한국 관료들이 6월25일 새벽에 오끼나와로 원정골프를 떠났다고 가정한다면, 한국 근대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은 3년 뒤 휴전되면서 군자리 골프장은 다시 복구 작업에 들어가 1954년 재개장을 하게 됐다.
 
군자리코스는 정치와 관련된 로비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외교사절들과 미 장성들, 고위 정치인들이 모여 골프를 치면서 모든 대한민국의 외교는 군자리 골프장에서 해결되다시피 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은 연로했던 탓에 골프를 직접 칠 수는 없었지만 한국아마추어 골프 대회를 여는 등 골프를 장려했다. 한국 초대 대통령의 골프 사랑으로 인해 한국의 골프는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면서 다음 세대를 맞이한다.

국가기록원보관 사진, 1966 제주골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역시 골프를 장려한 대통령이었다. 1966년 4월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평소 생도들을 아끼고 애지중지했던 그는 인근의 태릉에 생도들을 위한 골프장을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 대통령은 “미래의 인재들이 골프를 모르면 나라 망신”이라고 했다. 해외 순방을 다니면서 그는 나름대로 골프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했다.

타국 정상들과 외교적 골프를 치면서 특별히 느낀 감정으로 그는 군 장성들에게도 골프를 권장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법이었다. 골프장 건설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군이 동원됐다. 사단공병대가 땅을 파면서 시작한 골프장은 착공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18홀이 완공돼 버렸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의 군인정신으로 지은 일사천리의 육군사관학교 골프장이었다. 코스는 사관학교답게 매 홀마다 1사단, 2사단 등 사단 고유 마크를 새겨놓고 군대식 이름을 붙였다.

1966년 11월5일 육사 태릉골프장개장식에서 박정희가 샷을 하고 있다

박정희는 골프에 애착을 가지면서 직접 골프를 친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골프 실력은 1백 타를 겨우 깨는 핸디캡 24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스윙에 꽤나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1년 5.16 이듬해부터 원로였던 한장상 프로에게 레슨을 받으면서 장충동 공관에 길이 15미터 폭10미터 정도의 간이 연습장을 만들 정도로 골프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골프를 치는 동안 경호는 삼엄했다. 라운딩을 할 때는 언제나 관할 경찰서에서 소속 형사들이 숲속에 잠복하면서 18홀까지 따라다녔다. 대통령 바로 옆에는 경호 총 책임자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고 일정 거리를 유지한 곳에는 2명의 경호원이 함께 했다고 한다. 물론 페어웨이 앞뒤에서도 10여 명의 경호원이 호위를 했다. 이런 삼엄한 경비 속에서 대통령 은 스윙을 한 뒤 골프채를 캐디에게 주지않고 총을 메듯 어깨에 메고 걸어가면서 푸른 잔디를 걷는 재미가 좋다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박정희식 골프는 이랬다. 1. 앞뒤 조는 절대 있으면 안됨. 2. 퍼팅은 단 한번만 함. 3. 티샷이 잘못되면 무조건 다시침. 4. 캐디는 무조건 최고로 예쁜 여자여야 함. 주변 경호원들에 따르면 국가 원수가 퍼팅을 하려고 계속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비굴해 보이고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까지만 해도 캐디는 모두 남자였으나 1967년 태릉의 육사 전용 코스가 개장되면서 박대통령의 캐디는 가장 예쁘고 센스있는 전용 캐디가 담당을 했다. 이 때부터 한국 골프장에는 여성 캐디들이 등장하게 된다. 박정희는 라운딩을 마치게 되면 늘 막걸리를 함께 했고 크고 작은 골프 대회도 주최하면서 골프애 관한 한, 널리 퍼지도록 장려에 앞장섰던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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