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이인세 칼럼니스트] 골프채 중에서 가장 민감한 퍼터는 수백 년 동안 뒷부분의 힐쪽에 샤프트를 연결하는 일자형 블레이드 형태 하나로만 유지되어 왔었다. 그 상식의 틀이 19세기 후반, 엉뚱한 골퍼에 의해 깨졌다. 그 발상의 전환으로 인해 오늘날 사용되는 퍼터는 샤프트가 중앙에 끼워졌거나, 헤드 뒷부분을 둥그렇게 만든 말렛형 퍼터 등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낸 골퍼는 누구였을까.

1백20여년 전인 1896년 뉴욕의 한 골프장. 홀컵까지 거리는 1미터 남짓에 왼쪽으로 경사져 있다. 아더 프랭클린 나이트는 퍼팅 자세를 잡았다. 홀 컵 하나 정도 왼쪽으로 겨냥하면서 늘 사용했던 블레이드 형태의 퍼터를 정확히 밀었지만,  볼은 왼쪽으로 당겨지면서 홀컵을 빗나가고 말았다. 아더는 화가 치밀었다. 조금 전의 퍼팅이 성공했으면 클럽 토너멘트에서 1등을 할 터였다. 보기 플레이어 수준의 평범한 주말골퍼인 아더가 속한 모학MOHAWK골프동우회는 뉴욕의 ‘스케넥터디SCHENECTADY’라는 조그만 타운에서 19세기 여느 동우회처럼 주말마다 라운딩을 가지곤 했다. 승부욕이 남달랐던 아더는어느날부터인가 퍼팅 때문에 번번히 돈을 잃었다. 퍼팅만 하면 볼은 중심에 맞지 않고 자꾸 안쪽으로 잡아 당겨지는 것이었다.

요즘이야 블레이드, 말렛, 토우, 힐, 센터 샤프트, 등 원하는 대로 맞춤 제작도 할 수 있지만 백 년 전에는 힐 부분에 샤프트가 꼽힌 블레이드형 한가지 뿐이었다. 아더는 순전히 퍼터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퍼팅의 실패는 아더로 하여금 새로운 퍼터를 발명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직업 자체가 발명가였던 아더는 연구에 몰두했다. 퍼터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보겠다는 발상이었다.

수 년 간 퍼터하고 씨름을 하면서 그는 히코리 재질의 나무 샤프트를 힐 대신 헤드 앞쪽의 토우 부분에 꼽아보기도 하고, 헤드 한가운데에 집어 넣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세종류의 퍼터를 들고 아더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어느날이었다. 이제까지의 퍼터 중에서 무게 배분이 가장 잘 된 헤드를 만들었고, 그 중심에 샤프트를 집어넣은 퍼터를 하나 완성했다. 심혈을 기울인 퍼터를 들고 그는 골프장으로 갔다. 여러차례 연습 퍼팅을 해보던 아더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사용했던 어느 퍼터보다도 퍼팅이 잘 되면서 백발백중 홀컵으로 볼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이 퍼터를 센터 샤프트퍼터라고 이름지었다.

다음주 동우회 모임에 아더는 새로 만든 퍼터를 들고 나가 우승을 했을 뿐 아니라, 가장 낮은 퍼팅수를 기록하며 클럽에서 퍼팅을 가장 잘하는 골퍼가 됐다. 센터 샤프트 퍼터는 이렇게 열성적인 한 발명가의 수년 간 노력끝에 탄생됐다. 1902년 아더는 이 퍼터의 이름을 자신이 사는 타운 이름을 따서 ‘스케넥터디 퍼터’라고 이름짓고 곧 바로 특허를 신청한 뒤  판매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퍼터는 불행히 많은 골퍼들에게 어필되지 못했고 판매도 기대에는 못미치고 있었다. 새 발명품이 부진을 보이자 이번에는 발상을 샤프트에서 헤드로 옮겼다. 당시에는 스틸로만 제작되어졌던 헤드 재질을 알루미늄으로 제작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아더는 다시 차고에 틀어밖혔다.  얇고 날카로운 블레이드 형태만이 퍼터로 인정됐던 시대에서 헤드를 둥글고 묵직하게 만드는 말렛퍼터같은 또 다른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1년 여의 연구끝에 이번에는 샤프트는 센터에 그대로 둔 채, 헤드의 재질을 스틸 대신 알루미늄으로 만든 말렛 센터퍼터를 고안해 냈다. 두번째 퍼터는 곧바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사용해 본 골퍼들도 모두 만족해 하고있었다. 종전의 블레이드 퍼터에 비해 헤드의 무게감으로 안정도를 더해 주기 때문이었다. 많은 프로골퍼들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 퍼터는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들의 필수품이 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골퍼 중 한사람이었던 월터 트레비스도 그 수예자 중 한 명이었다. US아마추어 3연패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던 선수였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늘 퍼팅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차에 그는 알루미늄 센터샤프트퍼터가 발명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당장 아더에게 퍼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더는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고 월터만의 센터샤프트퍼터는 그와 궁합이 잘 맞았다. 출전한 대회마다 월터는 우승을 했고, 1904년에는 미국 최초로 영국 아마추어 오픈에서도 우승을 하는 역사적인 영예를 안게됐다. 트레비스의 이름을 타고 이 퍼터는 순식간에 세계 제일의 퍼터가 되버렸다. 아더의 야심작이었던 센터 퍼터가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었다.

바람을 일으키면서 아더를 돈방석에 앉힐줄 알았던 센터샤프트퍼터는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위기를 맞게된다. 20세기 초반의 골프계는 아직까지도 영국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상황. 미국 골퍼에게 영국 아마추어 트로피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자존심을 구기고 화가 치민 영국왕실골프협회는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1910년 이 퍼터의 사용을 일방적으로 금지시키는 갑질을 해버렸다. 그 후 1952년까지 무려 45년 동안 센터샤프트퍼터는 미국에서만 사용되고  영국에서는 금지되어 버렸으니 당시 영국 사람들의 분노를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반면 미국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로 영국과 달리 센터 샤프트퍼터의  대유행이었다. 영국의 태도에 아랑곳 않은 미국골프협회마저 적극적으로 이 퍼터를 권장하기까지 했다.

미국에서의 인기와는 무관하게 이 퍼터는 또 다른 분쟁에 휘말렸다. 트레비스가 우승하던 당시부터 이 퍼터는 정작 발명가인 아더의 퍼터라기 보다는  ‘트레비스 퍼터’로 더 알려졌고, 트레비스 본인도 이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슬그머니 숫가락을 얹어 놓았다. 이같은 사실에 화가 난 아더는 특허권을 주장하며 트레비스측에 소송을 걸었다. 트레비스도 지지않고 당시 대형 골프클럽 제조사였던 스팔딩사와 손을 잡고 비슷한 퍼터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양측의 공방은 그렇게 수년 간 지속되다가 합의 단계에 들어가게 됐고, 센터 샤프트퍼터는 아더의 소원대로 그제서야 스케넥터디 퍼터로 명명됐다. 21세기 골퍼들이 다양한 형태의 퍼터를 사용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더가 생각한 발상의 전환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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