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이인세 칼럼니스트] 1926년 미국. 대공황의 깊은 수렁속에서 골프만이 사람들의 위안이 되고 있었다. 당대 세계 최고의 골프 명인은 영원한 아마추어인 보비 존스와 미국 최초의 진정한 프로 월터 하겐이었다. 하지만  동 시대에 두 영웅이 공존할 수는 없는 법, 사람들은 맞대결을 바랬고 무엇보다 본인들도 한판 승부를 원했다. 프로에서 최고지만 위대한 골퍼라는 칭호에 목이 마른 하겐은 존스를 꺾고 진정한 프로 의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반면 존스도 진정한 아마추어리즘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최초의 프로 선수가 된 33세의 하겐은 단 한 번도 돈이 안 걸린 경기는 하지 않는 지독한 프로기질을 보인 선수였다. 그는 아마추어리즘을 존경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비아냥을 샀지만 나름대로 프로 정신을 미국에 심어준 골퍼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반면 변호사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23세의 존스는명문 조지아 공대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를 개업할 정도의 수재였지만 늘 겸손했다. 고집스럽게 아마추어리즘을 실천한 존스는  페어 플레이를 추구하면서 ‘골프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보비 존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골프 레전드로 불리고 있었지만 프로다운 기질을 보인 월터에게는 심리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두사람의 대결은 미국뿐 아니라 본고장 영국에서도 최대의 뉴스거리였다. 1926년2월28일 플로리다의 화이트 필드와 3월 6일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서 각각 하루 36홀씩 2번을 싸우기로 했다. 첫번째 대결장인 플로리다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결투는 시작됐다. 첫 홀부터 이변이었다. 하겐의 드라이브 샷이 심한 훅이 나면서  볼이 왼쪽 나무숲에 처박힌 반면, 존스는 페어웨이에 사뿐히 볼을 올려 놓았다. 하겐은 늘 그랬듯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하는 프로답게 의도적으로 훅을 내면서 볼을 그린 주위에 붙였다.  반면 버디를 욕심내던 존스의 세컨 샷은 그린을 오버하면서 하겐이 파 세이브를 한 반면, 존스는 엉겹결에 보기를 범했다. 하겐이  첫 홀부터  리드를 하면서 대결은 흥미진진하게 흘러갔다.

매홀마다 그런 식이었다. 존스는 하겐의 변칙 골프를 몰랐다. 존스가  멋있는 페어웨이 샷을 치면 하겐은 슬 라이스와  훅을 냈다. 하지만 세컨 샷을  용케 그린 주변에 올려놓은 후 어슬렁 거리다가 쐐기같이 버디를 만드는 프로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갤러리들은 환호했다.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하겐의 천부적인 재능 때문에 존스는 갈수록 혼란스러웠다. 프로와 아마의 격차를 스스로 느낀 그는 패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7홀을 남겨놓고 이미 8홀을 진 존스는 손을 들어야 했다. 다음날 신문들은 ‘하겐이 69타를 쳤는데 존스는 담배만 69개피를 피웠다’며 비아냥 거렸다.  

세기의 대결을 벌이며 걸어가고 있는 두 선수. 잔뜩 긴장한 보비 존스는 말도 없이 인상만 쓰면서 표정 관라기 안되보이지만, 월터 하겐은 슬금슬금 말도 걸면서 넉살을 부리고 있는 표정이다

3월6일 파사디나에서의 두번째 대결. 존스는 세컨홀에서 어렵사리 파를 했다. 하겐의 볼은 홀 컵에서 15미터나 떨어져 있어 파도 쉽지 않은 상황. 퍼팅 라인에 선 하겐은 잠시 고개를 들어 갤러 리 틈에서 백인 아가씨에게 윙크를 보내는 여유를 보였다. 여성팬의 화이팅과 동시에  볼은 그대로 홀컵으로 빨려 들어갔다. 존스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번에는 파3홀. 20미터 퍼팅을 성공 해 모처럼 버디를 잡은 존스에게,  8미터 앞에 선 하겐이 “어떻게 생각 하시나. 내가 넣을거 같은가?” 하고 물었다. 존스는 “넣는다면 비기는 홀이겠지.”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주저없이 하겐은 버디 를 해버렸다. 말문이 막혔다. 이미 승부는 갈렸다. 무려 11홀을 남겨두고 하겐이 12UP이 돼 버렸 다. 존스의 완패였다. 하겐은 승부사다운 프로기질을 보여주었고, 존스는 고개를 숙이며 인정했다.

상금 1만달러를 받은 하겐은 5천달러를 병원에 기부한 뒤, 나머지 5천달러로는 존스에게 와이셔츠 소매 커프스 보턴을 선물했다. 존스는 “내가 저 커프스를 찰 때마다 그날의 패배가 떠오를 것”이라며 하겐이 자신을 두번 죽이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하겐과의 승부에서는 패했지만 존스는 몇 달 후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을  했다. 하겐도 1929년 브리티시 오픈을 우승하며  두사람은 동시대의 같은 무대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라는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정석 스윙에 입각한 보비 존스와는 달리 제멋대로의 스윙과 티샷을 날리곤 했던 월터였지만 반드시 경기를 이기고 마는 승부사 기질의 선수였다

하겐은 그렇게 확실한 프로이면서 또 괘짜였다. 하겐의 일화를 찾아보자. 1920년 영국 켄트에서 열린 디 오픈. 당시 보수적이었던 영국의 골프장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캔트 골프장측은 시합중 임에도 월터 하겐같은 프로선수에게 클럽하우스의 이용을 금지했다. 아마추어를 더 존경하던 시대에서 프로들은 냉대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월터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래? 한번 해보라지.” 라며 그는 리무진을 한대 고용했다. 주최측에 보란듯이 리무진을 클럽 하우스 앞에 떡하니 세워 놓고, 차문을 열어놓은 채 옷을 갈아 입고는 대회장의 첫 홀 티박스 앞까지 리무진 을 몰고 간 다음 차에서 바로 내린 뒤 곧바로 티샷을 해버렸다.  프로를 존중해 주지 않는 영국 골프장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꽃 향기를 한번 쯤은 맡을 시간도 있어야한다며 걱정 도 하지말고 급하다고 뛰지도 말라”며 낭만을 부르짖던 골퍼였다. 그는 내기의 왕이기도 했다. 어느 대회건 시범 경기건 상관없이 항상 내기를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22년 미국인 최초로 디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실력파 골퍼였다. 반항아 기질인 그의 주변에 팬들이 구름처럼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실력과 낭만, 그리고 쇼맨쉽을 겸비한 인기짱의 골퍼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빳빳하게 풀이 매겨진 실크 셔츠와 7부 바지에  흑백 수제 골프화를 고집했고, 입에는 시가를 문채 골프장에 나타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건방져 보이는 골프계의 풍운아였다.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캐디 생활로 근근이 살아왔던 그였기에 골프 인생만큼은 화려하게 살고자 하는게 목표였다.

실지로 그는 그렇게 살았다. “나는 백만장자가 되기는 싫다, 단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처럼 살아가고 싶을뿐이다.” 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미국 골퍼 최초로 백만달러 상금을 달성한 골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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