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이인세 칼럼니스트] 1875년 9월3일. 스코틀랜드의  노스윅골프장에 4명의 사나이가 등장했다. 올드 톰 모리스 와  영 톰 모리스 부자팀, 윌리 파크와  멍고 파크 형제팀이었다.  당대 최고의 포섬으로 알려진 이들 4명이 한판 승부를 겨루기 위해 모인 것이다. 이날 경기는 12홀 코스를 세번 도는 2인 1 조의 36홀 매치 플레이 방식이었다. 무려 1만 여 명에 이르는 구경꾼들도 아침부터 골프장에 모여 진을 쳤다. 최고수들이 벌이는 매치플레이는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최대의 흥미거리 인데다 내기도 꽤나 많이 걸린 터라 인기가 대단했다. 사실 영은 세인트 앤드루스 집에서 아내 마가렛이 아이를 낳는 산고를 치르고 있어 오늘의 대결을 내켜하지 않았다. 당시 스코틀랜드 에서는 남편이 출산을 지키지 않는 풍습이 있어 덜 미안했지만, 그래도 체력이  약한 아내가 걱정될 뿐이었다.

영 모리스 트로피

디 오픈에서  4차례나 우승한 상대팀의 윌리는 지난해도 올드 모리스를 이겼었다. 1860년 제 1회 디 오픈에서도  모리스를 누르고 첫 우승을 차지했던 바 있는 강자였다. 15년전 당시 아버지 모리스의 캐디였던  9살에 불과했던 영은 아버지가 윌리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훗날 아버지의 복수를 하리라’고 다짐했었다. 1867년 영은 카누스티에서 윌리와 맞붙었었는데, 당시 16살의 영을 햇병아리라고 비아냥거렸던 윌리를 플레이오프에서 보기좋게 눌러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한 바도 있었다.  두 집안은 이렇게 골프에 관한한 양보할 수 없는 숙적 관계였다.
  
시작부터 양측은 팽팽한 시소전이었다. 한 홀씩을 주고 받으며 12홀 한라운드가 끝났음에도 우열을 가릴수 없는 무승부가 지속됐다. 영의 스윙이 단연 돋보였지만, 엎치락 뒷치락하는 시소 게임은 34 홀까지 팽팽하게 이어졌고, 단 두 홀만 남겨놓은 상황. 이때였다. 긴장감이 흐르는  골프장으로 누군가가 끼어들어 적막을 깨뜨렸다.  전보를 들고 온 우체부는 홀에 서있는 아버지 모리스의 손에 용지를 쥐어주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관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모리스는 급히 전보를 펴보았다. ‘며느리와 손자가 난산으로 사경을 헤메고 있다’ 는 짤막한 내용이었 다. 아무일도 없다는 듯 모리스는 슬그머니 종이를 주머니에 구겨넣었다.

영은 35홀 그린에서 버디를 눈앞에 두고있어 전보에는 신경쓸 여유도 없었다. 황금같은 버디 를 기록하면 하루 종일 팽팽하던 균형이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었다. 마침내 영은 버디를 했고 모리스 부자가 한 홀을 리드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36홀은 동점이되어 결국 모리스 부자가  파크 형제를 한타차로 이긴 것이었다. 관중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버지가 내놓은 구겨진 전보를 본 영의 얼굴은 상기됐고,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두 부자는 동시에 페어웨이를 가로질러 골프장과 반대쪽인 바닷가로 뛰었다. 세인트 앤드루스까지 가는 기차가  끊어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간신히 배를  타고 세인트 앤드루스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래사장을 가로 질러 집으로 뛰어간 영의 눈앞에는 그러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난산을 견디다 못해 산모와 아이가 함께 사망한 직후였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 영은 넋을 놓고 먹지도 않은채 지냈다. 석달 남짓 흐른 크리스마스 이브, 깡마르고 초최하기 이를 데 없는 영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187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 에  침대에서 일어 나지 못한 채  그는 24살의 짧은 생을 뒤로하고 영원히 잠들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애석하게 아들을 잃은 아버지 모리스는 그날 이후 남은 여생동안 그 어떤 골프대회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 은둔했다. 불세출의 골퍼를 잃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의 묘지와 비석을 만들어 애도했다.
   

필자가 연전에 방문한 세인트 앤드루스 공동묘지의 입구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 1백미터 정도 맞은편에 있는 시멘트 벽이 시야를 끌어 당겼다.  수백구의 묘지 중에서 벽면에 세워져 있는 유일한 흰색의 회벽 동상이다.  세인트 앤드루스시 는 유일하게 영의 묘지에만 흰색 바탕의 비석과 벽에 동상을 만들어  후세 사람들에게도  골프 영웅에 대한 경의를 표하게 한 것이었다.
 
디 오픈에서 우승한 영 모리스의 17세 메이저 최연소 우승 기록은 1백55년이 흐른 현재도 깨지지 않고 있다. 영은1868, 69, 70년  등 3연패를 기록하면서, 디 오픈 창설 10년 만에 최초 의 메이저 트로피인 붉은 가죽 벨트를 영구 소장한다. 그 벨트가 한 사람에게 영구히 귀속되자 당황한 주최측은 다음 해인 1871년에 미처 트로피를 준비하지 못했고, 대회를 열지 못하는 해프닝까지 겪었다. 이듬해인 1872년에 겨우 새 트로피를 만들어 대회를 개최 할 수 있었다. 그 트로피가 바로 현재의 ‘클라렛 저그’이다.  이듬해 재개된 디 오픈에서 모리스는 또다시 우승을 해 최초의 클라렛 저그마저 차지한 골퍼가 됐다.
  
그의 스윙은 당대 최고였다.
170cm의 작고 다부진 몸이지만 특히 손목의 근력은 타의 추종 을 불허했다. 남다른 장타력에 모험을 두려워 하지않고 호쾌하게 드라이브를 날렸다. 그린 주위 의 칩샷도 일품이었다. 당시 골퍼들은 어프로치샷에서 칩 앤 런(CHIP AND RUN)을 구사했지만 , 그린 주위에서 볼을 높이 날린 뒤 백스핀으로 홀컵에 붙이는 모리스의  플랍 샷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당시 최초로 구사한 백스핀을  사람들은 ‘영의 발명품’이 라고 까지 했다. 특유의 퍼팅 자세 또한 일품이었다. 왼발을 오픈하고 볼이 오른발에 가깝게 위치하 는 자세로 백발백중이었으며19세기 영국에서 퍼팅으로 그를 이기는 골퍼는 없을 정도였다.

신이 선물한 골퍼 중 한명이었던 영은 짧은 생을 마감 했지만 지금도 영국인들은 가슴속 제일 깊은 곳에 그를 묻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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