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뉴질랜드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담긴 로토루아 호수를 뒤로 하고, 다시 남쪽으로 여정을 계속했습니다.
미니버스로 한참을 꼬불꼬불 달렸습니다. 도중에 잠자는 화산지대를 거치기도 하고 용암열에 녹아 있는 화산밭의 뜨거운 진흙을 슬쩍 만져보기도 하며 그렇게 쉬엄쉬엄 다니다가 어느 작은 호숫가에 지어진 아담한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근처에 일반 민가나 다른 숙박시설이 없는 외딴 곳이었습니다.  

뉴질랜드의 화산지대에서 지열로 인한 연기가 분출되는 모습 (필자 소장).
뉴질랜드의 화산지대에서 지열로 인한 뜨거운 수증기가 분출되는 모습 (필자 촬영).

큰 도로에서 좁은 길로 빠지며 사잇길을 돌아 한참을 들어간 하얀 단층집 호텔이었습니다.
예쁜 카페처럼 조용하고 음악이 흐르는 듯 분위기는 고풍스러웠고, 로비 앞면은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잔디밭을 지나면 작은 호수가 있더군요. 저 앞의 호수는 파란 물결을 살랑거리며 햇빛비늘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주변의 숲들과 아름다운 꽃이 여행객을 보며 웃습니다.

1층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호텔주인할머니와 그의 가족들과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면서 커피를 마시며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한가한 시간을 보냈는데, 이때까지 호텔의 숙박객은 나와 현지 가이드 겸 운전기사 달랑 2명이었습니다.
이 호텔은 주인 할머니와 40대 아들, 며느리, 어린 손녀가 함께 기거하며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족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지요.

조금 지나자 일단의 한국인 관광객 10여명이 우르르 몰려 오더군요. 반가왔습니다. 내가 보기엔 부부관광단 같았습니다. 잠시후 일본인 관광객 6~7명이 호텔로 들어왔습니다. 조용하던 호텔이 갑자기 북적거리며 분주해졌습니다.
알고 보니 이 호텔은 아시아권 여행객들이 중간 숙박지역으로 자주 이용한다고 합니다.

한국서 온 분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 방으로 들어갈 시간....
로비의 프론트 테스크 옆에 숙박객을 위해 영상물이 꽂혀 있는 진열장이 있었습니다. 진열장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한국 영화만 꽂혀 있더군요. 대다수가 오래전의 작품들이라 제목만 봐도 재미있데요.

주인 며느리는 처음엔 미국·호주 영화 등을 가져다 놓았는데, 한국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영화를 구해다 진열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상물이 자주 없어진다고 합니다.

한국관광객들이 영상물을 본 후에는 제자리에 갖다 두어야 하는데, 슬그머니 가방에 넣어 가져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상물이 자주 없어진다고 합니다. 영상물 뿐만아니라 모포와 커피잔도 가져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객실의 벽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 있더군요.
그것도 한글로...

1. 영상물 가지고 가지 마세요.
2. 모포 가지고 가지 마세요
3. 커피잔 가지고 가지 마세요
4. 타월 가지고 가지 마세요
5. 슬리퍼 가지고 가지 마세요
6. 가운 가지고 가지 마세요
   * 필요하시면 프론트에서 구입하세요.
     한국인의 양심을 믿습니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몰래 가져 갔으면 이런 문구를 방마다 걸어 놓았나 싶데요. 할 말이 없어지더군요.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객실에 붙어있는 문구에 대해 살짝 물어보았죠.

주인할머니는 한국인들은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고, 다정하고 인정도 많고, 잘 놀고 다 좋은데, 사소한 물건을 잘 챙겨가는 통에 골치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두 개의 방에서 모포, 커피잔, 슬리퍼, 타월, 객실용 가운이 몽땅 없어진 경우도 있었답니다. 갑자기 창피하더군요.

가져가지 말라는 문구가 붙여진 사연을 듣고나니 민망해지고 마음이 씁스레해지더군요. 호텔을 떠나는 날 아침까지 기분은 가볍지 않았지요.
무거운 마음을 알았는지 호텔주인 할머니는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외국인들도 가끔 그런다고 하며 웃습니다.

아무튼 다음 여정으로 떠나는 나에게 호텔주인가족들은 뉴질랜드에 또 오게 되면 꼭 다시 들러 달라고 하며 환하게 웃으며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다시 갈 기회가 되면 그 호텔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나저나 객실의 가져가지 말라는 문구는 없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없어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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