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더블린(Dublin)이라는 이름은 본고장인 아일랜드를 비롯, 호주와 미국 등 모두 10여 곳에 이른다. 특히 미국에는 캘리포니아,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조지아 등 8개 지역에 더블린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아일랜드 더블린지역 출신들이 여러 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을 건설할 때 고향을 잊지 말자며 이름을 붙인 까닭이다.

조지아주 더블린은 애틀란타에서 동남쪽 항구도시 사바나로 달리다 보면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76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매컴(Macom)이라는 곳을 지나면 갈 수 있다.
이곳 카운티에는 약 45,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더블린 시티(이스터 더블린 포함)는 약 20,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로 백인과 흑인의 비율이 60대 40정도라고 한다.

더블린 시가지.(사진=필자소장)
더블린 시가지.(사진=필자소장)

이 곳을 방문하던 날-

더블린 상징 배지
더블린 상징 배지

더블린 시내에는 마침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의 정확한 축제 명칭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더블린의 날'같은 축제였던것 같다. 마을 상징인 네잎 클로버 휘장이 집집마다 나풀거렸고 주민들은 온통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가슴엔 네잎클로버 배지를 달고 있었다. 심지어 여행객에게도 초록모자, 초록스카프, 네잎클로버 배지를 나눠 주었다.그때 받은 네잎클로버 배지는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

마침 더블린 웰컴센타(Welcome Center)를 방문했을 때 이 지역출신 미스 조지아주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더블린 시장과 지역신문 헤럴드 꾸리에 발행인 등 지역 인사들과 오찬을 즐기며,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헤럴드 꾸리에 사회부 여기자가 취재를 나왔다. 여기자는 나를 인터뷰하면서 코리언이 더블린을 방문한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라고 있다. 또 이 지역에 한국인이 5가구 정도 살고 있다고 전했다. 이곳에 살고 있는 한 교민 여성은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는데 대학생이었던 아들을 한국으로 연수를 보냈다고 했다. 고국에 애정이 남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축제를 준비하는 더블린 주민들.(사진=필자 소장)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축제를 준비하는 더블린 주민들.(사진=필자 소장)

마을 축제기간 중 그날 저녁에는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파티가 있다고 했다. 영향력 있는 동네 주민이 나보고도 참가하란다. 시간이 되어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마을 한 가운데의 넓직한 공터에는 식탁을 여러 개 이어서 붙여 만든 임시 공동식탁이 길게 놓여 있었다. 흰 식탁보가 덮인 그 위엔 닭과 감자로 만든 갖가지 요리가 놓여 있었다. 일일이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눈 대중으로도 닭요리만 40~50여가지가 되는 듯 했다. 이들 요리는 각 가정에서 각자 한 가지씩 만들어 가져 온 것이라고 했다.

파티가 시작되자 담소를 나누며 서서 닭다리를 뜯는 주민, 아예 접시에 가득 담아 여기저기 다니며 음식을 먹는 사람, 식탁에 붙어 서서 이것 저것 모두 맛을 보는 사람....닭요리 파티를 하는 모습이 아주 활기차고 이색적이었다.

파티가 벌어지는 공터 바로 옆에는 마을회관이 있었다. 2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을회관 안에는 여러명이 앉을 수 있는 원탁들과 무대가 마련돼 있었다. 더블린 시장이 곧 이어 이곳에서 연설을 한다고 했다.

더블린의 아이들도 재미있는 분장을 하고 축제에 참가한다(사진=필자 소장)
더블린의 아이들도 재미있는 분장을 하고 축제에 참가한다(사진=필자 소장)

이윽고 마을회관으로 모두 들어가 모일 시간이었다. 나도 마을회관에 들어가서 한 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시장의 연설이 끝나고 마을의 주요 인사들의 인사가 끝나자, 사회자가 갑자기 "미스터 장!"하고 나를 부르더니 단상으로 올라와서 인사말씀을 좀 하란다. 그 먼 한국에서 와서 자기 마을을 찾아 준 손님에 대한 예우란다.
당황스러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미리 귀뜸도 안해 준 상태인데다 마음의 준비도 안되어 있었다. 솔직히 공식석상에서 한국말도 긴장되는데 더듬거리는 '초보 영어'로 말하기가 겁났다. '콩글리시'라도 해야 했다.

할수 없이 나는 '콩글리시'로 마을과 축제에 대한 느낌, 주민들의 친절함, 요리가 맛있었다는 둥 어설프게나마 인사말을 간신히 했다. 그리고, 인사말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순간 '오우끼도우끼'라는 말을 떠 올렸다. 나는 “오우끼도우끼! 더블린, 땡큐!” 하곤 겸연쩍은 모습으로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단상을 내려왔다.

그러자 회관의 마을사람들이 모두 일어서며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오우끼도우끼'는 '짱이야!'라는 그 동네 속어였다. 아이들끼리 친구들에게 잘 쓰는 말이라고 낮에 누군가가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더블린 짱이야!' 하고 내려 온 셈이었다. 그 이후 나는 이렇게 불려졌다. ‘오우끼도우끼맨’으로...

다음날 아침 지역신문 헤럴드 쿠리에 2면 중간위치에 내 사진과 함께 ‘더블린에 온 코리언 오우끼도우끼맨’ 이라는 제목의 박스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았다.

나는 그곳에서 머무는 이틀동안  ‘오우끼도우끼맨’으로 불리우며 인기를 끌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떠 오르며 괜히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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