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이인세 칼럼니스트] 1898년 에딘버러와 런던의 중간쯤 되는 훌HULL이라는 항구도시의 한 아파트에 살던 입주자가 어느날 우연히 건물내의 벽장을 발견했다. 1백50여년 전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요행히 타지 않았던 벽장이었다. 내부 깊숙히 무엇인가 보관되어져 있었고 그것은 꽤나 값져 보이는  8자루의 골프채였다. 옆에는 1741년에 발간된 누렇게 바랜 요크셔일간지도 가지런히 함께 있었다.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의 올드코스골프장옆에 위치한 영국골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3 백 여년 전의 골프채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의 올드코스골프장옆에 위치한 영국골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3 백 여년 전의 골프채

거의 새것 같은 이 클럽들은 투박하고 두꺼운 물뿌레 나무(ASH TREE)로 만들어진 듯 보였다. 그립은 다소 거친 울로 감싸져 있었고, 헤드는 초창기 골프채의 길쭉한 롱 노우즈 그대로였고, 샤프트의 길이는 무려 45인치였다. 헤드 윗면에는 제작자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으며 헤드 앞쪽에는 단단한 동물뼈가 삽입되어 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왕이나 귀족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됐다. 2자루의 아이언은 마치 도끼날처럼 만들어졌다. 무게는 무겁고 단단했으며 매끄럽기 보다는 투박한 느낌이었지만, 보존 상태가 너무 좋아 보였다.

이 골프 세트는 감정결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나무 골프채로 판명되어 스코틀랜드의 명성있는 골프장인 ‘로얄 트룬’(ROYAL TROON)으로 옮겨졌다가, 최근 영국박물관에 기증돼, 일반인들도 관람이 가능케 됐다. 필자 역시 관람의 수혜자 중 한명이 되어 이 골프채를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나무 골프채를 우리는 통상 ‘롱 노우즈’(LONG NOSE)라 부른다. 헤드가 길쭉하게 뻗은 모양이 마치 서양 사람들의 긴 코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헤드의 토우부터 힐까지의 전장 길이가 길게는 한뼘 정도에 해당하는 길고 가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당시의 페더리 볼, 즉 거위털과 동물 내장을 만든 가죽 볼을 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초 통일된 영국의 첫번째 왕인 제임스 1세는 골프의 보급에 힘썼다. 그는 나무에 관한한 전문가인 활 만드는 제조공이었던 윌리엄 메인을 고용해 골프채를 만들게 했다. 수백 년 전에는 골프채를 만드는 장인이 없었기 때문에 활을 만드는 제조공이 이를 대신했다. 그들은 나무의 재질에 따라 활이 휘는 강도를 맞출 줄 아는 장인들이었으므로 샤프트의 강도에도 기술을 접목시킬 수 있었다. 당시에는 지정된 장인만이 클럽을 전문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샤프트의 원료는 물뿌레나무로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나무였다. 헤드는 가시 나무(THORNWOOD)등으로 만들었다. 샤프트와 헤드는 각각 만들었고 전 과정은 당연히 수제 작업이었다. 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클럽의 헤드 윗부분에 이름을 새겨 놓았다. 골프채에 새겨진 장인의 이름은 연대를 찾아내는데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오래된 골프채들은 장인들에 의해 수공업으로 만들어져서 장인의 예술혼이 함께 깃들어져 있다. 장인들의 골프채 만들기 경쟁은 계속 이어져갔다. 이들 중 자신이 만든 채를 들고 대회에 나와 우승을 한 업자들도 있었으며, 그 골퍼는 돈방석에 앉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같은 나무채는 얼마나 멀리 공을 날려 보냈을까. 골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2백야드 이상도 날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프트는 무거운데다 헤드는 좁고 길어서 골퍼들이 스윙을 하기에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 스윙조차도 백 스윙시 왼쪽 발의 뒷꿈치를 한껏 들어서 왼무릎까지 함께 돌려야 했다. 대부분 목뒤로 올리는 업스윙 위주였다. 다운스윙에서는 롱 노우즈 특성상 슬라이스와 훅을 피하기 위해 헤드의 가운데 부분이 앞뒤면보다 움푹 들어간 상태여서, 한가운데의 스윙 스팟에 정통으로 맞으면 2백야드 정도는 족히 칠 수 있었다.

 

▲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의 올드코스골프장옆에 위치한 영국골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3 백 여년 전의 골프채와 이인세 칼럼니스트

 

당시 사용되던 페더리 볼은 거위 깃털을 동물 내장속에다 넣고 말려서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현재의 볼 보다는 가벼워 공기저항을 많이 받았던 때문에 2백 야드 정도가 한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6 자루 정도의 롱 노우즈 한 세트로 한 라운드에 몇 타 정도를 쳤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19세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1859년 앨런 로버트슨이라는 페더리 볼을 만드는 장인이 ‘올드코스에서 한 라운드를 80타를 깼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분석하면 일반인들은 90타에서 120타정도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는 ‘히코리 클럽 동우회’가 결성되어 있다. 이들은 예전 선조들이 쓰던 둥근 모자와 무릎까지 오는 7부 바지를 입고 골프채는 나무클럽으로만 사용해서 대회를 연다.

다만 공 만큼은 예전의 비싼 가죽 페더리 볼이 없어 최근의 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히코리 나무채를 사용해서 후대의 골퍼들이  수 백년 전 선조 골퍼들을 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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