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 ‘절기 도둑은 못한다더니 처서(823)를 지나자 아침 공기부터가 다르다.

긴 장마와 폭염이 엄습했던 여름이 가고 있다. 북적이던 여름 해변도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때문에 호젓한 분위기를 맛보고 싶다면 이맘때의 바닷가가 그만이다.

느지막한 여름휴가, 어디로 떠나야 하나?

장소도 맘에 들어야겠지만 가는 길도 가깝고 수월해야 한다. 이 같은 기준을 감안한다면 국내에서는 제주도가 단연 으뜸이다.

비용 부담은 있어도 비행기에 올라 한 시간이면 별천지에 와 있게 되니 편히 쉬고자 할 경우 매력 있는 코스가 아닐 수 없다.

제주에서도 호젓한 가을맞이 여정을 꾸릴만한 곳이 있다. 비양도가 바로 그곳이다.

제주 한림읍 소재 비양도는 에메랄드 해변이 아름답게 펼쳐진 제주 서부의 금릉-협재 해수욕장 인근 작은 섬이다.

등대가 있는 섬마을 산정에 올라 한라산과 해남 땅을 굽어보고, 바닷가를 따라 시원스레 펼쳐진 섬 한 바퀴를 둘러보자니, 유유자적 여유로운 여행의 묘미에 푹 젖어들게 된다.

제주의 또 다른 매력, 비양도 섬 트레킹

제주도를 제주 본 섬 밖에서 바라다보는 것도 썩 괜찮은 감상법이다. 제주도의 낯선 길을 렌터카 편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자면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기가 일쑤다.

하지만 제주의 작은 섬, 비양도를 찾아서는 색다른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제주바다의 에메랄드 물 빛깔과 하얀 백사장이며, 초록의 광활한 구릉위로 펼쳐진 오름, 그리고 구름이 휘감아 신비감마저 도는 한라산 등 이전에 느낄 수 없던 이색 풍광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 한림항에서 북서쪽으로 5해상에 자리한 비양도는 동서 1.02, 남북길이 1.13의 둥글납작한 작은 섬이다.

죽도라는 다른 이름을 지닌 기생화산으로, 정상 비양봉(해발 114m)에서 바라보는 제주의 풍치가 압권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고려 목종 5(1002) 비양도에서는 활발한 화산활동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 바다 한 가운데 산이 솟아나왔는데 산꼭대기에서 4개의 구멍이 뚫리고 닷새 동안 붉은 물이 흘러나온 뒤 그 물이 엉키어 기와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비양도를 향하는 배는 한림읍 소재 한림항에서 탈 수 있다. 자그마한 도선여객 터미널은 시골 간이역 대합실처럼 한산하다.

비록 여름 성수기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비양도를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도선이 한림항을 빠져 나오자 이내 거친 물살을 만난다.

태평양과 맞닥뜨리는 제주도는 포구를 벗어나면 짙푸른 바다색깔 만큼이나 물길도 드세다. 배가 가른 물살이 선상위로 튀어 오른다.

쪽빛 하늘에 피어오른 하얀 구름은 시시각각 상상화를 펼쳐 놓는다. 따가운 늦여름 햇살도 날려줄 시원한 바닷바람 속에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자니 15분이 훌쩍, 곧 비양도 선착장이다.

비양도 트레킹은 두 가지 코스로 나뉜다. ‘섬 일주비양봉 트레킹이 그것으로, 섬 한 바퀴만 돌기 보다는 산 정상에 올라 섬 주변을 굽어보는 것도 묘미가 있다.

때문에 우선 비양봉 정상을 오른 후, 섬일주에 나서는 코스를 권한다. 비양도에는 여름철 핑크빛 백일홍이 만발한다. 초록이 싱싱한 섬 속에 간간이 박혀 있는 붉은 백일홍의 자태가 곱기 만하다.

마을 돌담길 사이 채마밭을 지나 산 정상으로 향한다. 가파른 오솔길 군데군데 나무계단을 설치해 오르기가 한결 수월하다.

능선의 억새밭은 모진 해풍이 가지런히 빗질을 해둬 그 모습이 말쑥하다. 송골송골 맺힌 땀이 뚝뚝 떨어질 무렵 오르던 길을 되돌아보면 시원스런 제주의 풍광이 펼쳐진다.

포구의 울긋불긋 지붕과 쪽빛바다에서는 한적한 섬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트레킹 도중 그늘에 들면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파고들고, 땡볕에 나서면 이내 폭염과 맞닥뜨린다.

하지만 흘리는 땀방울만큼이나 몸과 마음은 한결 개운해진다. 바로 늦여름 트레킹의 묘미다.

계단을 지나 키가 한 길을 넘는 산죽, 풀숲 터널을 지나자 하얀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등대는 오랜 세월 비양도 해역을 지키고 안내해 온 수호천사에 다름없다.

등대는 또 비양도 최고의 전망 포인트다. 협재-금릉해수욕장의 에메랄드 물빛깔이며, 오름과 한라산, 그리고 저 멀리 전남 해남 땅 끝의 산자락도 수평선 아래 낮게 깔린 구름위로 봉긋 솟아 있다.

먼 바다를 향해서는 대형 어선과 상선이 다투어 물길을 가르고, 그 기다란 자국을 작은 어선이 힘겹게 가로질러 포구로 돌아온다.

여느 제주 여행 때와는 또 다른 묘미. 제주의 산세와 지세, 그리고 바다를 새롭게 대할 수 있는 신선한 여정이 비양산 등대아래 펼쳐진다.

산 정상 트레킹은 오르는데 30, 경치감상에 하산까지 도합 1시간이면 거뜬하다. 산행의 골인 점은 선착장이다.

이제 섬 순환트레킹에 나설 차례. 마을 어귀 작은 가게에서 청량음료를 한 잔 마시니 그처럼 알싸할 수가 없다.

섬을 한 바퀴 도는 길은 포장이 잘 되어있다. 바다와 나란히 달리는 낮은 길은 편안한 느낌이다.

푸른 하늘에 피어오른 흰 구름과 완만한 해안 길, 그리고 쪽빛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천혜의 섬 트레킹코스가 펼쳐진다.

곳곳에서 해녀들의 숨비 소리가 들려오고, 자원봉사에 나선 아주머니들이 파도에 밀려온 쓰레기 줍기에 여념 없다.

해안은 검은 화산돌 천지. 애기를 업은 듯한 애기 업은 돌’, 코끼리를 닮은 코끼리바위등 용암이 분출돼 굳은 기암괴석이 비양도 해변을 장식하고 있다.

섬을 절반 이상 돌아서면 산자락 아래 제법 널찍한 습지가 나타난다. ‘펄낭이라 불리는 염습지이다. 해수와 담수가 섞인 큰 방죽 주변으로 나무 데크와 쉼터, 전망 포인트 등이 마련돼 있고, 시원한 산책코스도 이어진다.

바다 일색의 풍광에서 만난 섬 속 습지가 더 귀하게 다가온다. 간간히 만나는 트레커들도 예외 없이 이 곳 정자와 나무 데크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한다.

잠깐 땀을 식히고 나니 발걸음이 가볍다. 포구 마을엔 전교생이 5명 뿐인 작은 분교가 있는데, 학교 정문이 정랑으로 돼 있어 이곳이 제주 땅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섬 한 바퀴를 도는데 쉬엄쉬엄 2시간여. 비양봉 트레킹까지 합쳐도 3시간이면 비양도의 속살을 들춰 보기에 충분하다. 트레킹 전 주문한 보말죽을 맛보고 일어서니 포구에 본 섬으로 향하는 배가 들어오고 있다.

여행메모

가는 길

제주공항~한림항= 자동차로 30분소요.

한림항~비양도= 한림항에서 도선이 오전 9, 12, 오후 3시 출항. 15분소요. 왕복 어른 6000, 어린이 3600. 도선여객터미널(064-796-7522/ 011-691-****)

비양도~한림항=오전 916, 1216, 오후 316분 출항.

미식거리

비양도 선착장 앞 호돌이식당에서 보말죽, 소라물회를 맛볼 수 있다. 보말은 제주 바닷가 돌멩이를 뒤집어 잡을 수 있는 고둥 종류로, 일명 고매기라고도 부른다.

보말죽은 부드럽고 쫄깃 고소한 게 먹을 만하다. 섬 트레킹에 앞서 보말죽을 미리 예약 해두면 빨리 맛볼 수 있다. 보말죽 1만원, 한치물회 1만원.

 

모슬포항구에 자리한 항구식당은 자리돔 요리 집으로 유명하다. 자리돔물회와 구이가 대표메뉴. 자리물회-구이(3마리,1인분) 7000.

묵을 곳

섬 내 몇몇 집에서 민박을 운영한다. 3~7만원까지 다양하다.

 

▲ 김형우 여행기자

 

김형우 여행기자

조선일보 출판국 기자, 스포츠조선 레저팀장을 거쳐 현재 여행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관광기자협회장, 2010~2012 한국방문의해 위원, 서울시 관광진흥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관광공사 베스트 그곳 선정 자문위원, 한양대 관광학부 강사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여행기자들이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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