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보험과 신탁의 제도개편이 진행되면서 한편으로 장기개발금융을 전담하는 민간 금융회사의 설립이 현실화됐다. 개발금융은 일반적으로 융자기간이 장기이기 때문에 인플레에 따른 위험을 부담해야하고 융자규모도 거액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개발금융 자금의 공급은 한국산업은행이 담당했다. 민간개발금융회사의 설립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있었으나 재원조달의 애로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7년 4월 국제금융공사(IFC) 등 외국자본과 국내민간자본과의 합작으로 한국개발금융주식회사가 설립됐다. 한국개발금융주식회사는 주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나라 금융기관은 중앙은행, 일반은행, 특수은행과 비은행금융기관으로 구분된다. 비은행금융기관은 은행법 적용을 받지 않으면서 일반상업금융기관과 유사한 자금중개기능을 수행한다. 자신에 대한 채권 즉, 간접금융증권을 발행해 민간으로부터 자금을 흡수하고 수요자에게 대여한다. 금융시장이나 자본시장에서 금융자본 매매도 수행한다.비은행금융기관은 대체로 요구불예금을 취급하지 않고 있다. 일반상업은행과는 달리 신용창조기능이 크게 제약된다. 그러다보니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앙은행의 금융정책 규제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나라 특수은행제도는 1954년 4월, 한국산업은행 설립부터 시작된다. 이전에도 1918년 설립된 조선식산은행(해방후 한국식산은행 개칭)이 장기산업금융을 담당했지만 6.25동란후 전쟁피해복구와 물자 생산의 증강을 위한 장기산업자금의 정비, 원조물자와 재정자금의 효율적 공급 및 관리, 산업금융체계의 정비 등을 위해 새로운 장기산업금융 전담은행의 설립이 필요하게 됐다.이러한 배경 아래 1953년 12월 한국산업은행법이 제정됐고 1954년 4월1일자로 정부의 출자와 한국식산은행의 자산부채 승계에 의해 한국산업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자본주의 발전으로 국가는 경제 성장과 조정을 위해 국가 자금의 개입을 필요로 하게 됐다. 이를 위해 다양한 특수은행이 설립된다. 공공성 및 공정성이 강조되는 산업분야에 대한 자금공급이 영리성 또는 전문성의 이유 때문에 회피되는 경우 특수은행을 통해 정책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특수은행은 일반상업은행 한계로 인해 자금을 공급하기 어려운 국민경제의 특수한 부문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설립된 은행이라고 볼 수 있다.특수은행은 보완성과 전문금융기관의 전문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어 자금조달과 운용면에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은행법에 의거하여 설립되고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의 규제를 받는 금융기관을 일반은행이라고 한다. 보통 상업은행이라 한다. 일반은행은 가계 및 기업으로부터 요구불예금 및 저축성 예금을 수입하여 이를 재원으로 기업 또는 일반인에게 주로 단기대출을 취급하는 이른바 상업금융업무를 영위했다.이밖에도 기업에 대한 설비자금공급을 위한 장기금융업무와 내국환업무, 외국환업무, 지급보증, 유가증권의 인수, 매매 및 대여, 보호예수, 국고대리업무 등 광범위한 금융업무를 취급한다.우리나라의 일반은행은 19세기말 일본은행지점 및 한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나라의 현대적인 의미의 생명보험제도는 1891년 일본의 제국생명이 부산에 대리점을 두면서 시작됐다.이후 많은 외국계 보험사가 진출했으며, 1910년 한일합병이후 우리나라에 진출한 외국의 생명보험회사들은 1914년 2월 서울에 생명보험동업회를 두어 자활협의 기구로 운영했다.외국 생보사의 활발한 생명보험 영업속에서 민족자본에 의한 생명보험건립이 태동됐다.1921년 당시 한성은행 등에 관여하고 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계 보험회사인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가 자본금 50만원으로 본점을 당시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나라 보험업에 대한 미군정의 보험행정 개시는 1945년 9월7일 맥아더 사령부가 공고 제1호로서 남한 전 지역에 군정을 실시한다는 내용으로 출발했다. 그해 12월6일 법령 제33호로 ‘조선 내 소재 일본재산의 군정청 귀속에 관한 건’을 공포함에 따라 조선화재를 비롯한 15개의 일본 손해보험사의 국내지점이 군정청에 귀속됨과 동시에 관리를 받게됐다. 미군정하의 보험행정은 조선미군청 재무국 보험과에서 주관했다. 미군정의 보험행정은 손해보험 특히 화재보험이 그 중심이었다.1978년에 발간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왕조는 일본의 강압적인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다. 이 시기 일본은 물론 미국, 영국 등 세계 주요국들이 통상관계를 맺고 우리나라에 진출한다.외국의 주요 기업과 금융기관 등이 잇따라 우리나라에 진출하면서 이들 국가들은 자국기업의 경제활동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 보험회사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해상보험과 화재보험을 중심으로 한 손해보험영업기관을 상륙시킨 것이 우리나라 보험사의 시초라고 하겠다.이 땅에 최초로 진출한 보험사는 일본 동경해상화재보험주식회사다. 1880년에 제일은행 부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56년 증권거래소 설립은 한국 자본시장의 발달의 기초가 됐지만 운영미숙으로 혼란도 가져오게 된다. 증권거래소의 설립당시 자본금은 3천만 원으로 증권단을 비롯, 금융단, 보험단이 공동으로 출자한 영단제(營團制)로 출범했다.증권거래소 개소 당시의 상장 주식은 12개사 13종목이었고, 채권은 국채 3종목이었다. 상장종목은 거래소 서립이전 증권업협회에서 매매되고 있던 주식 11종목에 증권거래소 출자증권과 연증주(聯證株·후 증금주)가 추가 13종목이다.13개 종목을 보면, 조흥은행, 저축은행(제일은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나라 주식은 1899년 현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이 주식을 발행한 데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 조직적인 증권시장이 태동하게 된 것은 한일합방 직후다. 일본의 증권시장 육성책에 따라 1931년 7월 1일 조선취인소령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의 격동의 혼돈 속에서 우리나라는 증권시장에 대한 싹을 꾸준히 틔웠다. 해방 후 1946년 1월16일, 구 조선증권취인소가 군정명령 제43호에 의거, 폐쇄되어 일제 강점기에 가지고 있던 조선증권취인소 상장주식 소지자들의 환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휴전 후 금융산업은 전쟁복구와 인플레 해소에 역점을 뒀다. 그 결과1957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서서히 안정화 되가는 모습을 보였다.1957년 이후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서 통화팽창을 억제하기위한 ‘재정금융안정계획’을 수립해 통화가치 안정과 단일환율 유지에 노력했다.뿐만 아니라 57년부터 60년 사이의 안정 모색기간 중 도입된 거액의 외국원조에 뒷받침되면서 산업생산이 점차 성장했다.이에 따라 금융기관에서는 예금이 증대되고 자산재평가 및 증자를 통한 자본의 충실화와 은행경영 정상화가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53년 7월 휴전 후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초점은 전쟁복구와 악성 인플레 수습이라는 2대 과제로 모아졌다.정부는 그해 말 국제연합군사령부와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협약’을 맺는다. 협약에서 경제재건과 물가안정의 결의를 밝히고 재정의 균형, 금융의 안정화, 단일환율의 설정, 자유기업원칙, 대충자금운용원칙 등 경제재건의 기본방향을 설정했다.이에 따라 500대 1의 단일환율 유지와 이를 위한 재정금융의 긴축정책이 실시됐다.금융면에서도 경제재건 뒷받침을 위해 한국산업은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50년 3월 ‘경제안정15원칙’에 따라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그러나 6월12일 한국은행이 설립된 지 나흘 후 6.25 동란으로 우리나라는 큰 시련을 맞았다.한국은행은 전시금융체제로 전환하고 1950년 6월28일 정부의 남하와 함께 본점을 대전으로 이동했다. 또 한국은행이 보유한 금과 지금은(地金銀), 현찰 등을 긴급히 소개했다. 그 뒤 전선의 남하에 따라 한국은행도 본점을 대구로 옮겼다가 다시 부산으로 이전했다.당시 우리정부는 전쟁수행을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한국은행 설립 초창기, 금융통화위원회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니다.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총재와 은행감독부장을 제외한 한국은행 직원을 임명하는 등 운영과 관리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금통위 의장은 재무부장관이 맡았다. 현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정책결정기구로서 한국은행 총재 및 부총재를 포함하여 총 7인의 위원으로 구성돼있다. 한국은행 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겸임하며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부총재는 총재 추천으로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마침내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맡게 됐고 건국시책으로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한국은행 설립에 대해 1955년에 발행한 ‘한국은행 5년사’를 근거로 당시에 게재된 내용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전한다. ‘한국은행 5년사’의 한국은행의 설립의 경위에 따르면, 8.15해방을 계기로 신중앙은행법과 은행신용제도 전반에 대한 법률제정의 필요성은 건국시책의 일환이었다.앞서 조선은행은 1947년 4월에 ‘중앙은행설립대강’이라는 제목 아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조선은행 설립과 더불어 일본의 금융자본침투가 본격화됐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나라의 금융제도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새로운 정비확장과정을 거치게 된다.1978년 재무부가 발행한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먼저 1911년에는 한일 간 금리차에 따른 일본 자금의 과도한 한국유입을 막기 위하여 ‘조선이식제한령(朝鮮利息制限令)’이 제정됐다.1912년에는 1906년에 발포된 ‘은행조례’를 폐지하고 ‘은행령’을 공포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동경영에 의한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한 금융기관은 일본 제일은행이었다. 일본 제일은행은 1904년 구(舊) 한국정부와 국고금 취급에 관한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중앙은행업무를 담당하게 된다.이어 1905년에는 화폐정리에 관한 업무를 위임받아 우리나라의 유일한 발권은행으로서 기능도 하게 된다.그러나 국가의 권리에 속하는 은행권발행특권을 외국의 1개 민영은행에 맡길 수 없으므로 한국정부는 일본 총독부와 협의하여 1909년 7월 ‘한국은행조례’를 공포하고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에 합병된 조흥은행은 과거 우리나라 최초민족은행 출범에 관한 시작과 관련해서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 우리은행으로 한국 금융역사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2020년 한국금융 역사는 121년을 맞이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3일 서울 회현동 본점에서 창립 121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오랜 기간 우리은행과 희로애락을 같이한 고객, 역대 은행장 12명, 손태승 우리금융그룹회장 겸 우리은행장을 비롯한 임직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손태승 회장은 창립기념사에서 &ld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895년 4월15일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이에 따라 청일간에는 청나라 봉천성(奉天省) 남부의 요동반도를 일본에 넘긴다는 조항을 넣은 마관조약(馬關條約)이 체결됐다. 그러나 내용이 공표되자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은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는 결의를 표명했고 해군함대를 동원 간섭하자 일본은 요동반도의 영구점령을 포기했다.이 와중에 러시아는 신흥세력으로 새롭게 대두됐다.역사적 배경 속에서 조선왕조는 민씨일파를 중심으로 배일친로(排日親露) 정책이 표면화됐다. 청일전 개전 이래 일본은 조선내정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된 후 제18은행, 제58은행 등 일본계 금융기관이 속속 우리나라에 진출했다.일본계은행의 우리나라 진출은 한일 간의 외환거래를 통하여 양국의 교역증대와 상거래의 원활화를 기하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내막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수단으로서 금융자본을 진출시킨 것이다.우리 국민들은 우리상공업자의 권익보호를 위하여 민족자본에 의한 근대적 금융기관의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1894년 갑오경장 이후 조선은행, 조흥은행, 제국은행 등이 설립됐으나 자본력의 미약으로 1년도 못되어 모두 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