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나라에서 지방은행 역사가 시작된 해는 1967년이다. 그해 1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통해 “지역적 자본을 집대성하여 그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동원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추진할 것”임을 밝힌데서 출발한다.이후 지역개발금융의 추진이 지방은행 설립으로 구체화됐다. 즉 경제개발의 추진으로 낙후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지역경제를 개발하기 위하여 새로운 금융기관의 설립이 요청됐다.대통령 연두교서에서 지방은행 설립문제에 대한 정책당국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수협중앙회 의결기구와 집행기구의 장인 회장은 수산청장 추천, 농림수산부장관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임기는 3년이다. 농림수산부장관은 제청 시, 사전에 재무장관과 합의하도록 돼있다. 이는 수협의 신용사업부문이 한국은행법 및 은행법상 금융기관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회의 의결기구로서는 총회, 대의원회, 이사회가 있다. 최고 의결기구인 총회는 회장과 회원의 대표인 조합장으로 구성하며 의장은 회장이 된다.대의원회는 회장과 회원조합장이 뽑은 13명의 대표로 구성된다. 법정적립금의 사용, 사업계획 및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78년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민단체는 1908년 한국어업법 제정공포와 함께 그해 7월 10일 설립된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과 거거제한산모곽전조합을 그 효시로 한다.1910년 한일합병에 의해 동법이 폐지되고 1911년과 1912년 각각 총독부어업령과 어업조합규칙이 공포 시행되어 종래의 2개 조합은 1912년 11월30일에 거제어업조합으로 통합발족됐다.이 조직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연안지역단위의 어업조합, 도 단위의 연합회, 전국단위의 중앙회 체계를 이룬다.기업 어업자들의 조직인 수산조합 및 동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8.15광복 당시, 약 150만명의 북한 피란민이 월남했고 6.25동란으로 약60만동의 주택이 파괴됨으로써 우리나라 주택난은 심각해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됐다.정부는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을 계기로 전쟁복구사업계획의 일환으로 주거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하여 100만호의 주택건설안을 내놓았다.1954년에는 주택금융을 전담할 기구로서 한국산업은행을 지정하여 재정자금에 의한 주택금융을 전담케 했다.1956년까지는 주로 대한주택영단 및 지방자치단체에게 주택건설자금을 융자하여 6천230호의 재건주택, 복구주택,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구농협은 신용사업의 탈락과 사업기반의 취약성 및 정치성의 개입으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적자운영만을 지속했다.통합 전 우리나라의 농업금융은 신용사업을 전담하는 농업은행과 경제사업을 담당하는 농업협동조합의 이원적 구조로 형성되어 있어 상호유기적 연관이 결여된 상태에 있었다.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농업은행과 농협의 통합론이 대두됐고 5.16 혁명을 계기로 통합원칙이 정부방침으로 결정됐다.마침내 1961년 8월15일에 농업은행과 구농협을 통합 새로운 종합농협이 탄생했다. 즉 농업협동조합은 1961년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농업금융 위축으로 1953년 이후 고리사채가 성행하자 한국경제에 커다란 문제로 부각됐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1955년 농업신용제도 개편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농업금융에 대한 제도적인 정비와 함께 정책적인 검토가 요청되면서 미국의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단이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소위 ‘존슨안’과 ‘쿠퍼안’으로 된 2개의 건의안이 제출됐는데 이를 계기로 농업은행법과 신용조합법 등 각종 관계입법조치가 논의됐으며 정부는 금융조합과 동연합회는 해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해방 전 1895년 대한천일은행, 1903년 한성은행 등 민족은행 등이 잇달아 설립됐으나 은행들의 업무가 도시에 국환돼있다는 지적에 따라 지방금융의 유통과 농업에의 신용제공을 위해 특수한 금융기관 설립이 요청됐다.78년에 발행한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시대적 요청에 따라 1901년에 농공은행조례가 발포됐으며 이어서 전국 7개 지역에 농공은행이 설립됐다.1907년에는 지방금융조합령에 의해 근대적 협동조합금융을 표방한 금융조합이 각지역에 창설됐다. 1년 뒤인 1908년에는 장기식산자금의 공급과 척식사업의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서민금융전담금융기관으로 ‘한국국민은행’이 출범했지만 5개월만에 체질을 강화를 위한 서민금융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해 법 개정 필요성이 대두됐다. 한국국민은행법의 개정으로 1962년 8월 10일,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자문이 구해졌다.자문의 주요내용은 ▲국민은행을 단일특수법인으로 하고 정부의 직접적 감독 하에 둔다 ▲자본금을 5억원으로 하되 그중 50%는 정부가 출자하고 30%는 5개 시중은행이 공동으로 분할출자하며 잔여 20%는 한국국민은행의 납입자본금으로 충당한다 ▲재무부장관, 한국은행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국민은행(현 KB국민은행)은 1962년 서민금융 전담은행으로 설립됐다. 국민은행 설립 전부터 우리나라 서민금융은 권문세가의 양반이나 큰 상인을 제외한 어전, 소상인, 수공업자, 일반 농민 등을 대상으로 한 객주와 여객이 담당해왔다.그 이후 무진업, 대금업계, 전당포 등 서민들을 대상으로 고리자금운용을 통한 무자비한 이윤증대수단으로 이용됐다.1978년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유사서민금융기구 중에서도 무진업(無盡業)은 우리나라 계(稧)와 그 연혁이나 성질이 유사할 뿐 만 아니라 상당히 조직적이어서 제도적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중소기업은행은 중소기업금융전담 금융으로서 1961년 8월 1일 설립됐다. 2020년 8월 1일 창립 59주년을 맞이한다. 78년 발간한 한국30년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전담금융기관 설립 논의는 1957년 2월 2일 제23차 임시국회에서 주식회사 농업은행을 특수은행으로 개편하고자 농업은행법을 의결하면서 나왔다. 당시 “전국10개 도시에 산재하는 농업은행의 도시점포는 농업은행법이 시행된 후 1년 이내에 도시중소상공업자…서민을 위한 은행으로…분리설립할 것”이 부대 결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한국수출입은행은 수출입, 해외투자 및 해외자원개발 등 대외 경제 협력에 필요한 금융을 제공해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됐다.경제성장과 함께 연불(延拂)거래방식에 의한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과 해외투자 등을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전담금융기관의 설립 필요성이 1960년대 후반, 제기됐다.한국수출입은행법은 1969년 7월 제정되면서 설립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지만 곧바로 수출입은행이 설립되진 못했다.2004년 한국은행이 발간한 우리나라금융제도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여건과 재정사정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60년대 정부는 한국은행 자매은행으로서 외환전문은행을 발족시키기로 하고 법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1966년 6월 14일 한국외환은행법의 모체인 한국환금은행법안을 성안하여 제52차 국무회의에서 가결하고, 6월24일 국회에 제출했다.1978년 재무부가 발간한 한국금융30년사에 따르면, 한국환금은행법의 골자는 외국환거래와 무역금융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한국환금은행을 설립한다.(법안 제1조)또 자본금은 100억원으로 하고 한국은행이 출자한다(제4조). 환금은행은 외국환업무와 무역금융업무에 관련된 전반적인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해방이후 외국환업무취급 민간은행이 처음 설립된 때는 1947년 6월이다. 군정법령 제145호 ‘조선환금은행법(朝鮮換金銀行法)’에 따라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이 같은 금액을 출자해 조선환금은행이 탄생했다. 조선환금은행은 ‘외국과의 교역통제(군정법령 제93호)’에 의한 권한을 일부 위임받아 부분적으로 외환업무를 수행했다.본격적으로 외환업무를 취급한 날은 1950년 6월12일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부터다. 조선환금은행의 외환 및 무역금융업무는 모두 한국은행에서 취급하게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서울은행과 한국신탁은행 은행장들은 1976년 4월17일 합병계약서 조인식을 가졌다. 5월13일 양 은행 정기주주총회에서 합병계약서는 원안대로 승인됐다.이날 합병은행의 경영진이 구성됐는데 서울은행은 이사 및 감사 11명중 이사 6명이 사표를 제출하여 수리되었고 새로이 윤승두 한일은행장이 은행장으로 선임됐다. 상무이사에 최병식, 전유상, 이사에 신영철, 이중호, 상임감사에 장석원 등이 잔류하게 됐다.한국신탁은행 또한 이사 및 감사 10명 중 이사 4명과 감사가 사표를 제출하여 수리되었고 전무이사 장명섭, 상무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경제개발시기 5개 시중은행의 하나로 한국경제 성장 주역의 하나인 서울신탁은행은 1959년 12월1일 순수한 민간자본에 의해 국내 최초의 지방은행인 서울은행으로 창립됐다. 1976년 서울은행과 한국신탁은행이 합병해 서울신탁은행을 발족했고 1995년 서울신탁은행이 서울은행으로 상호와 CI 변경했다. 다시 2002년 서울은행과 하나은행이 합병해 하나은행으로 흡수됐다.서울은행 발족경과를 보면, 1959년 9월10일 윤호병을 비롯하여 이정림, 이양구, 최태섭, 박두병, 김광균, 박필희 등 실업계인사가 발기인이 되어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우리은행의 전신중 하나인 한일은행은 1932년 12월16일에 창립된 조선신탁주식회사와 1937년 8월14일 창립된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에서 시작된다.한일은행은 이 두 은행에서 출발하여 1946년 양사가 은행으로 전환하고 1954년 다시 합병으로 탄생됐다.1978년 재무부가 발간한 한국금융30년사에 게재된 내용을 중심으로 한일은행 발전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우리나라는 1910년대 신탁업을 시작해 1920년대에는 30여개사가 난립할 정도로 많아졌다. 1931년에 ‘조선신탁업령’을 비롯한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현재 SC제일은행(한국스탠다드차타드)의 전신인 제일은행은 1929년 7월1일 ‘조선저축은행령’에 근거하여 설립된 조선저축은행이 효시다.조선저축은행은 1928년 12월24일자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공포된 ‘조선저축은행’과 1930년 6월에 실시된 시행규칙에 의거하여 특수금융기관으로 그 첫발을 내딛게 된다.소매금융 강자로 출범했던 제일은행의 역사는 기구하다. 1929년 조선저축은행으로 출범하여 1950년 한국저축은행을 거쳐 1958년 제일은행으로 이름을 변경한다.그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구한말, 국가재정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에 따라 국가재정은 물론 원활한 상거래 지원을 위한 민족은행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화폐의 융통 및 상무(商務)의 흥왕(興旺)’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족은행의 하나인 대한천일은행은 한국상업은행의 모체로 오늘날 우리은행의 모체이다.1978년에 발간한 한국금융30년사에서는 한국상업은행의 성장과정을 창업기(1899~1910). 합병매수기(1910~1945), 발전기(1962~1974), 국제화기(1975~1977)로 구분했다.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876년 2월26일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계 은행들이 대거 우리나라에 진출해 개항지 상권을 석권하기 시작했다.한국 조야에서 속히 근대적 금융기관을 설립하고 민족상인들의 금융을 지원해 우리 상권을 보호해야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시대적 기운과 민족적 흥망에 부응해 1897년 2월19일 서울 재계의 부호인 김종한, 민영찬 등이 발기로 탁지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한성은행이 창립, 경성 중서 광토방에 있는 전교환소에서 영업을 개시했다.조직과 규모는 작아도 한국금융사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우리나라 은행의
[우먼컨슈머= 박문 기자]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경제가 성장함과 동시에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장 제약 요인이 나타났다.정부는 1972년 8월2일 당시 헌법 제73조에 의한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이 발동됐다.다름 아닌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공포해 다음날인 3일부터 시행토록 한 이른바 ‘8.3긴급경제조치’를 단행한 것이다.‘8.3긴급경제조치’의 핵심은 기업이 과중하게 안고 있던 채무의 원리금상한부담을 경감하여 그 재무구조를 개선